내과의사 ‘박용건’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늦더위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한줄기 신선한 바람이 지난 10월 1일 가톨릭대학교에 불었다. 노숙자들에게 13년째 인술을 펼치고 있는 서울 성가복지병원 박용건 내과의사가 제1회 ‘이원길 가톨릭 인본주의상’을 수상한 일이었다. 생명을 주제로 한 ‘가톨릭 인본주의 국제포럼’에 앞서,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이에 대한 시상이었다. 한창 돈을 벌어야 할 시기에 서울 강남의 개인병원을 접고 노숙자, 행려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병원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한 그는 남다른 가치를 선택하였다. 이 땅의 소위 ‘아저씨’들과는 다른, 그만의 가치있는 삶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인간은 가치 선택적 존재이다. 어떤 가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이는 선후본말을 분별하는 지혜와 무관하지 않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도 될 일을 분별하는 눈, 중심적인 것과 말엽적인 것을 식별하는 눈이 그의 삶을 결정한다. 어느 곳에 가치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와 방식과 노선이 달라지는 것이다. 올바른 결정을 한 사람을 지혜롭다고 칭송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산업의 역군
2013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아저씨’라 불리는 이들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있는가.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모든 이들이 산업 역군이 되어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렸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이 땅에 살던 이들이 늘 그래왔듯이 서로 나누고 베풀며 살았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윤리도덕과 예의범절을 우선시하였고,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그러나 수출입국(輸出立國)의 표어 아래 경제성장이 최우선적인 목표가 되었고, 산업화에 따른 도시 인구증가에 발맞춰 서울과 수도권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투기, 복부인, 졸부, 불로소득, 일확천금, 한방, 대박, 로또라는 말이 일상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1997년 IMF사태, 2008년 리먼 사태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였고, 직장인들이 정리 해고되었으며, 개인들이 파산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부익부 빈익빈과 그에 따른 계층 간의 양극화 문제가 표면화하였다. 물질적 가치에 따른 삶의 질 문제가 최고의 화두가 되고 말았다. 특히 경제활동의 주역이었던 ‘아저씨’들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아저씨들 꿈을 접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저씨’들은 세파에 시달리며 젊은 시절에 품었던 꿈과 희망을 접었다. 아니 꺾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지향 가치가 달라진 세상에서 가정을 지키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큰 포부와 드높은 이상을 내려놓아야만 하였다. 큰 포부는 세상물정 모르던 시절에 그렸던 그림 속의 떡이었고, 드높은 이상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였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고는 현실적이고도 실현가능한 눈앞의 세속적 가치에 순응하며 전력 질주하였다. 가치 중심을 돈, 지위, 명예, 권력에 두고 정신적 가치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게 된 것이다.
아저씨는 돈벌어 오는 사람?
문득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 인도에 덕이 높은 스님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궁궐에서 법회가 열렸는데, 문지기는 초라한 승복을 입은 스님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스님이 궁리 끝에 말끔한 승복으로 갈아입고 가자 문지기는 더 이상 막지 않았다. 법회가 끝나고 공양 시간이 되었다. 스님이 벌떡 일어나 걸쳤던 승복을 벗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맛난 음식들을 쏟아 붓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유를 묻자 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여러 차례 이곳에 왔으나 매번 들어오지 못했소. 그런데 지금 이 옷으로 인해 이곳에 들어와 좋은 음식을 얻었구려. 그러니 음식은 마땅히 이 의복에 주어야 할 게 아니오.’라고 하였다. 물질적 가치 우위의 시각이 만들어낸 일화라 아니 할 수 없다. 물질적 가치는 곧 경제적 능력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과 인격마저도 대변할 것이라는 선입관과 편견이 만들어낸 해프닝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아저씨’들도 이러한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기 8,3)는 성경구절이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돈벌어오는 사람으로 전락한 우리 ‘아저씨’들은 오늘 어떤 가치 지향의 꿈과 희망을 품고 있을까. 언젠가 들은, 후배 ‘아저씨’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형은 아직도 꿈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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