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삶의 척도가 되라?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 척도가 되라.’ 척박한 우리 철학의 땅에서 자생하는 들꽃 같은 철학자 강신주의 말이다. 참 멋진 말이다. 더욱이 자발적으로 성취의 노예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오늘날의 우울한 ‘성과사회’(한병철)에서 얼마나 요긴한 말인가.
강신주는, 사람이 부당한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리라는 절박한 결기로 단 한 번뿐인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투철한 자기애를 다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을 노예로 삼는 일체의 외적, 초월적 권위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근엄한 학자들도 떵떵거리는 판검사들도 꼿꼿한 장수들도 인생에 무슨 욕심이 더 이상 남아있을까 싶은 노객들도 권력 앞에서 쩔쩔매고 앞을 다투어 몸을 굽히는 세상에서 삶의 주인이 되라는 철학자의 소리는 흡사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세례자 요한의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이 역사 안에서 ‘창조와 심판의 역할을 떠맡으면’ 과연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일까. 사람이 스스로 삶의 척도가 되면 인간도 세상도 정말 더 나아지는 것일까. 척도로서의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모든 척도로 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얼마나 참혹했는가. 강신주의 논리라면 자신을 삶의 척도로 삼는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독재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저마다 스스로를 삶의 척도로 여기는 사회는 결국 저 혼자만의 왕국을 구축하고 일체의 타자를 배제하는 냉혹한 지옥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
내가 믿지 않는 신
나 역시 강신주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일체의 외적, 초월적 권위를 상징하는 신’을 거부한다. 앞에서는 신을 믿는다고 결연히 고백하지만 뒤에서는 자본과 권력에 흔쾌히 무릎을 꿇고 굽실거리는 이들의 신을 나는 믿지 않는다. 온갖 기름진 말로 신을 찬양하고 떠받들지만 신의 이름으로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들의 신을 나는 거부한다. 평화를 얻기 위해 신을 찾지만 정작 신을 몇 평 남짓한 비좁은 성전 속에 가둬놓는 이들의 평화의 신을 나는 믿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저마다 스스로 삶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강신주의 말에 대해서는 그가 일체의 신에 회의적인만큼 회의적이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일체의 외적, 초월적 권위를 거부해야 한다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다른 모든 이를 노예로 만들 수 있는(만들었던) 인간의 절대성은 왜 거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신 없는 사회의 인간?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신을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참다운 사람일 수 있다. ‘신이 없는 사회가 대단히 점잖고 쾌적한 곳이 될 수도 있다.’(필 주커먼) 그리고 신이 인간 역사에서 언제나 문제적 존재였다는 것도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신은 위험하다. 그러나 신이 없는 사회의 인간은 더욱 위험하다. 인간이 오로지 자신만을 삶의 최종적 근거로 여기는 것은 인간 자신이 거부한 신의 자리를 스스로 꿰차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참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대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자신(만)을 척도로 삼는 우리 사회와 사회체계는 결국 힘없는 사람들을 벼랑 끝에 내몰지 않았던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동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이라고 자처하거나 내세운 적이 없다. 그분은 그 누구도 노예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서로 친구 맺기를 원했다.(요한 15,15 참조) 그분은 심지어 보잘 것 없는 사람들로 취급받았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꺼려하지 않아 ‘먹보요, 술꾼’으로 조롱받았으며, 힘 있고 근엄하고 점잖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피하는 세리나 죄인들까지도 넉넉히 친구로 삼았다.(루카 7,34 참조)
그분은 ‘자신의 노예’로 사는 세상에서 인간을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 속에 사는 존재로 불러내기 위하여 한 평생을 다해 살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인간이 구상하고 생각하는 모든 신의 관념을 깨뜨렸다. 그분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경험하는 신의 저편에 여전히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어쩌면 무신론자라고 고백하는 한 작가의 절규와도 같은 기도 속에서 그렇게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신이여, (인간의) 잔혹함의 인자는 대관절 어디에 들어 있습니까?”(한승원, ‘한 무신론자의 가을기도’, 광주일보 201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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