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계절, 위령성월
추수 끝난 텅 빈 들판과 아낌없이 내어 놓고 빈 몸으로 서 있는 과실수들,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흩어진 낙엽들이 머리를 숙이게 한다. 때가 되면 이렇게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왜 그렇게 우리는 더 가지려고 할까.
아무리 좋은 음식도 많이 먹으면 탈이 나듯 우리네 삶도 차고 넘치면 탈이 나게 마련인데. 혹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더 큰 힘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야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가 있다. 태양과 북풍의 지나가는 나그네 옷 벗기기 시합. 북풍은 차갑고 강한 바람을 일으켜 옷을 벗기려 했으나 나그네는 오히려 몸을 잔뜩 움츠려 옷깃을 여미고, 태양은 부드럽고 따스한 햇살을 보내니 나그네는 옷을 벗는다. 참된 힘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갓난아이 앞에서 주먹을 쥐는 사람은 없다. 미소를 띠며 허리를 구부려 아이를 본다. 손을 펴고 팔을 벌려 아이를 안는다. 누군가를 무장해제 시키는 힘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힘은 이런 약함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1, 42-44)
노자는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은 그것들 아래에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백성 위에 오르고자 할 때에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할 때에 반드시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도덕경 66장, 참고)
참된 힘
참된 힘이란, 참된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받아들이고, 앞에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고 하셨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된다. 그 작은 씨에 새들도 가지에 깃들일만한 큰 나무가 되는 힘이 들어있듯 하느님의 나라도 그렇다. 크고 강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힘이다.
참된 힘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힘은 높고 강한 곳이 아니라 낮고 약한 곳에서 나온다. 낮추고 비워야 하느님이 함께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비워내야 채워지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도 당신 자신을 비우셨다.(필리 2,7) 하느님의 힘이 채워질 수 있도록.
무소유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를까.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내 안의 것을 다 비워내기 위함은 아닐지. 땀을 쏟고 숨을 뱉어내며 정상에 오른다.
숨은 가쁘고 다리는 저려오지만 순간 가슴이 확 터지면서 내 안의 모든 것이 텅 비워지는 느낌. 그리고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신선한 기운. 새로운 힘을 얻고 내려온다. 다 내려놓고 내려온다.
사람들은 왜 바다를 찾을까. 어디 한 곳 막힘이 없는 바다를 바라보자면 내 마음도 어디 막힘이 없이 한없이 넓어진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뻥 뚫리는 느낌. 그리고 그 안으로 차오르는 새로운 기운. 새로운 힘을 얻고 돌아온다. 다 비워내고 돌아온다.
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잔뜩 껴입지만 나무는 오히려 다 벗고 알몸이 된다. 철새들이 이동할 때가 되면 뼛속까지 다 비워낸다고 한다. 텅 빈 것의 힘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은 큰 부를 축적한 사람도 아니고 강한 무기를 소유한 사람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 계절, 위령성월에 돌아가신 분들과 돌아가는 자연을 기억하며 묵상한다. 힘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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