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새벽도 조선 조정에서 천주교인들을 재판한 기록인 「추안급국안」과 「사학징의」를 들고 있었다. 아들, 며느리를 둔 점잖은 학자들이 줄줄이 묶여와 매를 맞게 되었다. 꽤나 대접받고 살던 사람들이 새파랗게 젊은 포졸들의 호통을 참으며 시키는 대로 따랐다. 생전 그런 모욕은 당해본 적이 없으나 모욕이라고 느낄 틈도 없다.
1801년 최창현은 43세, 이승훈 46세. 정약용 40세, 이존창 43세, 권철신 66세, 조동섬 62세, 홍교만 64세…. 지금의 나이로 치면 60대, 80대의 할아버지들이다. 신문관은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그들에게 곤장을 쳤다. ‘죄인 권철신’은 얼버무리며 둘러대는 짓이 마땅히 매질하며 신문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너무 늙고 병들어 고문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40대의 ‘죄인’들도 청년 때 시작한 천주교 때문에 중늙은이가 되어 고문을 받고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점잖은 할아버지들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금방 들통이 나서 불호령이 떨어지는데도 말이다. 42세인 정약종은 박해가 심해지자 자신의 집에 있던 책과 성물 등을 궤짝에 넣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런데 이 짐을 지고 가던 임대인이 붙들렸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가 제대로 불어만 준다면 쳐놓은 그물이 고기로 가득찰 판이었다.
정약종은 교주로 지목받았다. 소굴과 패거리, 요사스런 책의 유통과정을 대라고 추궁 당했다. 이에 그는 자신이 문자를 이해했기 때문에 따로 배운 스승은 없고, 혼자뿐이라고 버텼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이미 정약종의 궤짝에 있던 편지나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그 질문도 깊고 날카로왔다. 관리들은 천주학을 섬겼던 방법과 첨례 때 무얼 걸어놓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천주를 모시는 일은 어디서나 가능하고, 천주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화상을 만들어 첨례 때 걸어놓고 의지하며 사모하는 정성을 드린다고 했다. ‘신부’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서양과 중국에는 신부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다고 했다. 이 순간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는 이 교우 집, 저 교우 집을 전전하며 피신하고 있었다.
분통이 터진 관리들은 역으로 천주교인들의 진실성을 꼬집었다. 천주학은 진실하다고 하면서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느냐고 몰아부쳤다. 정약종은 진실하라고 배웠지만, 죽을 때는 혼자 죽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냐고 대답했다. 관리들은 천주학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던데,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다른 사람을 대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같은 무리를 꼭집어 말한다면 나라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행한 현인으로 인정하여 관직을 주고 상을 준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렇지 않고 번번이 형벌을 내려 죽이니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관리는 바로 정약종에게 최창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했다. 교회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정약종이 또다른 기둥인 최창현을 모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관리는 흰 무명에 비단테두리를 한 휘장을 만들어 가지고 온 사람이 최창현이 아니냐고 따졌다. 정약종은 그제서야 “다시 생각해보니 최창현은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천주학을 한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최창현이란 이름을 조정이 파악하고 있음을 알고서야 인정했다. 그들이 탄로날 때까지 버틴 것은 자신이 천주교를 믿었다는 사실이 아니고 천주교와 연관된 다른 이들의 이름이었다.
신유박해 때 체포된 초창기 교회 선비들은 신문과정에서 그 대답이 천편일률적이다. 그들은 전에는 천주학을 했으나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지내지 않아 처형된 진산사건 이후에는 천주학을 중단했다고 했다. 천주교는 혼자 했기때문에 아는 이는 없다고 했다. 정부에서 다른 이의 이름을 집어내어야만 인정했다. 속으로 이미 잡힌 사람들을 짐작해서 그들만을 대주려는 궁리는 눈물겹다. 신유박해 때에는 신자들끼리 미리 대답내용을 약속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렇게 동료를 보호하고자 했다. 신문과정에서의 그들의 답이 순교자로서의 답이었는지, 배교의 말이었는지는 차후의 일이었다. 그들은 교회를 보호할 방법을 미리 논의하고 체포된 후에는 그렇게 지켜갔다.
최근 교회 내 일부 신자들이 정의평화를 위한 사회활동에 대해 의사를 표시했다. 사회의 정의와 평화 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입장에서 소외된 이웃을 챙긴다. 그러나 정의평화 활동을 하는 분들이 같은 울타리 내에 있는 사람들과 다함께 공명하려는 노력을 조금 더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그들에 반대하는 분들도 일정 ‘명목’을 가지고 그들을 남의 그룹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한번 더 그 이야기를 경청했으면 싶다. 우리끼리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동료의 이름을 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머리 굴려가며 거짓말했던 그 할아버지들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매 맞고 목숨 내놓으면서까지, 또 배교자로 지탄받을 각오를 하면서도, 보호하고 싶었던 교회와 교우들이 있었기에 할아버지들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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