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신앙의 번역’이라는 제하에 문학작품과 영화, 공문서와 언론보도들에서 나타나는 무지하거나 사악한 번역 오류를 가볍게 토로한 적이 있다. 언어뿐만 아니라, 삶의 오역이 심각한 결과를 야기함을 우려하고,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이 삶 전체 맥락 안에서 해석되고, 말과 행동으로 바르게 번역돼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최근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월급날이었던 11월 25일자 신문들은 난리도 아니었다. 일간지 1면들이 “가톨릭 교리, 사제 정치 개입 금지”라든가 “대주교의 쓴소리 ‘司祭 정치 개입은 잘못’” 운운했다. 사안은 두 가지. 전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님의 신앙의 해 폐막미사 강론. 필자의 취지는 이 사안들이 일부 일간지들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고 ‘번역’되는가이다.
우선 폐막미사 강론의 맥락을 보자. 교구장 대변인 허영엽 신부의 설명이 유용하다. 허 신부는 “공의회 이후 교회의 정치, 종교 관계에 대한 원칙”을 환기시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시기와 내용의 공교로움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다.
단순화의 위험은 있지만 강론 요지를 보면,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의무”, 다른 하나는 사제는 ‘정치 구조나 사회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공의회 이후 사회교리에 대한 강조, 교황의 최근 행보와 말씀들을 고려할 때, 첫 번째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언론들이 ‘사제 정치 개입 금지’로만 향한다. 의도된 것같은 ‘번역’이 타당한지 원문을 조금 더 보자. 강론의 근거는 교황 연설, 교리서, ‘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 등 세 가지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6월7일 바오로 6세 홀 예수회 학교 학생들과의 질의응답에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라고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길은 다양하고, “정치생활 역시 그 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라고 덧붙였다. 자기 삶터에서 충실한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2442항)는 “정치구조(political structuring)나 사회생활의 조직(organization of social life)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사제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정치 구조’와 ‘사회생활의 조직’은 ‘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에서 구체화된다. 33항은 “사제는 ‘정당’이나 ‘노동조합’ 안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을 수 없다”(교회법 287조)고 했다.
따라서 강론은 사제들에 대해 정치적 의미와 결과를 담은 활동 전반에 대한 포괄적 금지보다는 정당 활동 등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 참여 금지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떤 것이든, 사제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논란이 되고, 분열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으며, 서울대교구장의 우려 역시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교회법, 교회 가르침에 대한 비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에, 강론을 꽤 많은 신문이 호기스럽게 보도하듯 평신도의 정치 참여는 의무이지만, 사제는 무조건 안된다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른바 ‘정치개입’이 뭘 지칭하는지 애매하고, 사제들 역시 그리스도인이며, 다만 직무상 신자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제지당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면서 사제에게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제도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들린다.
글의 마무리 역시 허 신부의 말을 빈다. “가톨릭의 전체 입장이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정치권이 이번 상황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쟁의 도구로 사용해선 안됩니다.” 다양한 의견들을 분열의 표지로 보거나 이를 빌미로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길하게도, 자신들이 민주화의 상징이라 부르던 김수환 추기경을, 얼마 뒤에는 편의에 따라 친북으로 몰던 어떤 신문의 작태가 데자뷰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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