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존여비와 가부장제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윤리적 규범으로 강요받았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붙어 다녔다. 그것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딸, 남편에게 좋은 아내, 자식에게 어진 엄마가 되는 길이었다. 그런 여성을 효녀·열녀·현모라 칭송하였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마을마다 정문(旌門)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효녀·열녀·현모가 왜 부정적인 말이겠는가. 문제는 그런 미덕의 저변에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는 남존여비의 사고와 가족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가부장제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데 있다. 오늘날에도 마땅히 높이 기려야 할 미덕이지만, 무조건적인 복종이 내재되어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버지의 명령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남편의 권위에 말대꾸조차 못하며, 자식의 위세에 입을 닫았던 질곡의 삶이 전제되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새색시가 벙어리로 3년, 귀머거리로 3년, 장님으로 3년을 살아야 비로소 그 집안의 여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였을까.
오늘날 여성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여성들도 그들만의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집안일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가족구성원과 분담하게 되었으며, 취업과 사회진출에 있어서도 공식적으로는 남성과 차별대우 받지 않을 정도로 좋은 시절이 되었다. 아직도 여성들 머리 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삶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여성들은 여전히 그들 스스로 삼종지도의 틀 속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딸로서 어버이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꿈과 희망을 밝히고 가고픈 길에 대해 상의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고 그 길을 터주길 바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종종 든다. 또한 아내로서 자신과 어울리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살 방도를 스스로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만 잘 만나면 모든 일이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지 않은지 되묻게 된다.
‘십 분 더 공부하면 남편이 바뀐다.’는 급훈이 여고 교실에 여태까지 붙어있는 현실이 이런 의문을 부추긴다. 그리고 엄마로서 자식만 잘 되면 집안이 불처럼 일어나리라는 기대는 더욱 심하다. 엄마는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자식이 영어, 그림, 속셈, 피아노, 태권도 등 온갖 학원을 전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는 듯한 착각 속에 바쁘게 살아간다.
이러한 상황에 갇힌 여성들에게는 아버지의 딸로서, 남편의 아내로서, 자식의 엄마로서의 꿈과 희망만이 남아 있는 셈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타인에게 투영된 삶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가운데, 여성 자신의 꿈과 희망은 알게 모르게 실종되고 만 것이다. 봉건질서 속에서 태동된,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매도하던 삼종지도의 끈질긴 인습과 안이한 타성이 그처럼 왜곡된 삶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우리의 여성들에게 다이어트와 성형이 최대의 화두가 된 현상 역시 진정한 꿈과 희망이 실종된 데에서 오는 반향이라고 하면 억측일까.
우리나라의 성(性) 격차
얼마 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3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in 2013)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 격차 지수가 조사 대상국 136개국에서 11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경제력, 정치영향력, 교육, 보건의 네 가지 기준에서 형편없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최근의 통계자료가 반영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여성 대통령과 여성 장관을 배출한 나라에 걸맞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이에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의 여야 의원들이 국정감사에서 일제히 비난하자, 여성가족부 장관은 “앞으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과 임금격차를 줄이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과연 우리의 성 격차를 해소하는 길이 경제적 측면에만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여성은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 매인 존재가 아니다. 남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이다. 여성 스스로 그런 인식을 확고히 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갈 때 여성의 존엄성도, 진정한 남녀평등도 실현되지 않을까.
‘남녀는 서로 다르지만 그 품위에서 동등하며, 그 모습에서 하느님의 힘과 사랑을 드러낸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35항)
김문태 교수는 현재 가톨릭대학교 ELP(Ethical Leader Path) 학부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교구 사목국 노인사목연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