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챠드에서 일하는 선교사가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를 배웅하러 공항까지 갔다. 출국을 안내하는 전광판 위에는 세계의 시간을 나타내는 지도가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왜 아프리카시간은 없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비행기가 가는 곳만 표시하기 때문이라고 궁색하게 답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아프리카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 한국언론들이 아프리카의 만델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델라는 그만큼 철벽같은 세계도 뚫고 들어갈 삶을 살았다.
자유없이 살던 이, 자유의 상징이 되다
1993년 넬슨 만델라와 당시 백인 대통령 드클레르크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검은손과 흰손이 잡고 있는 모습, 이것이 만델라의 업적이었다. 만델라는 10년을 금지령 아래, 27년을 감옥에 있었다. 드클레르크는 만델라의 활동을 제약하고 감옥에 넣었던 체제의 대표가 되었다. 이들이 평화적 방법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새로 태어나게 한 공로자가 되었다.
만델라는 1918년 남아프리카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규교육을 받아 왕의 자문이 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포트헤어대학에 진학하면서 흑인차별에 대해 눈떴고, 자신은 단순히 코사부족의 한사람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임을 자각했다. 만델라는 학교를 졸업하고 흑인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며, 비폭력 인권운동을 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에 전념했다. 그는 인종차별이 더 심해져 가자 전술을 바꾸어 아프리카민족회의 아래 행동단체를 결성하고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했다. 이로써 그는 금지령을 받았다. 금지령은 여행, 공공장소 출입 등을 제한하고, 금지령을 받은 이들끼리의 대화까지도 막았다. 그러나 그는 1962년 에티오피아에서 열린 ‘범아프리카 자유운동’회의에 참가했다. 그리고 또 파업들을 사주했다고 하여 종신형에 처해졌다.
만델라는 감옥 안에서도 자유에 대한 투쟁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갇혀있는 자유의 투사를 잊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구호가 되었고, 경찰의 가혹한 공격이 일상사처럼 되어도 흑인 주거지역은 통치가 불가능해졌다. 정부는 이 상황을 해결할 이는 감옥에 무기수로 앉아 있는 만델라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드클레르크 대통령은 1989년 인종분리정책을 폐지했다. 만델라는 이듬해 27년 감옥생활을 끝냈다. 그는 무혈로 정치범을 전원 석방토록 했고, 흑인의 투표권을 받아냈다. 그는 흑인들 모두가 투표할 수 있던 날, ‘국민의 겸허한 하인’으로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감옥에서의 이상, 세계가 공명하고
만델라는 감옥 한켠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그런 그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그가 자존감을 잃지 않고, 아프리카인 전체와 일체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의 단결이 그를 있게 했다. 당시까지 국가 조직을 이끌던 백인들은 그에게 실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부를 공격하지 않고 화합을 시도했다. 그래도 흑인아프리카인들은 만델라를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회도 그들을 주시했다. 국제사회는 인종차별을 강행하는 남아프리카와 무역을 중단하고, 국제대회 참여를 금지하며 제재를 강화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의 흑백 인종평등은 만델라의 승리이며 동시에 남아프리카의 승리이고, 인류가 이룬 작품이었다.
더욱이 만델라 정부는 탄압자들을 포용했다. 그는 집권하자 인종분리정책 철폐운동을 해왔던 성공회의 투투주교를 과거사 정리를 위한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백인정권하에서 저질러진 민주화투쟁 인사에 대한 암살행위나 인권탄압자들을 조사하여 청문회에 세웠다. 그러나 청문회 과정에서 잘못을 인정한 백인은 대통령이 사면해 주었다. 만델라는 이렇게 흑백의 평화적 공존을 도모했다.
만델라가 활동하던 60년대 미국에서는 루터 킹목사가 인권운동을 하고 있었다. 킹목사의 주장은 케네디대통령에 의해 법제화되었다. 링컨대통령이 노예를 해방시켰지만 흑인의 평등권은 100년 후 케네디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다. 여러 종족의 원주민과 15세기 희망봉발견 이후 이주해온 네덜란드인, 근대 다이아몬드와 금광을 바라고 이주한 유럽인들, 도시에 거주하며 상업에 종사하던 인도인들이 이룬 복잡한 역사를 가진 국가이다. 대를 이어 이 땅에 살던 백인들과 새로 들어온 백인들은 서로 경쟁하다가 결국 단결하여 흑인을 희생으로 자신들의 갈등을 해소했다. 그 긴 투쟁의 역사를 만델라는 상생으로 나아가게 했다.
만델라가 인권의 상징적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의를 찾아 행동했고, 화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는 그에게 공감했다. 공감은 인간 공동선을 살린 정의와 타인의 대한 존중에서 나오는 울림이다. 남과 북, 진보와 보수, 빈부 등 수없이 갈래짓는 우리사회에서 만델라의 이름을 불러본다. 특별한 기원이 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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