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요한, 1899∼1966)은 어렸을 때부터 ‘천주교가 골수에 배인’ 신자였다. 그는 일제하에서는 교육자, 광복 이후 건국기에는 외교관,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야당 지도자, 4·19 이후에는 국무총리, 그리고 5·16 이후에는 정치활동이 금지된 ‘구정치인’으로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다. 이처럼 시대와 정국의 변화에 따라 그의 세속적 지위는 부침이 심했지만, 태어나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신앙인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유수철 신부(1918~1977)는 증언한다. “그의 신앙은 깊고 철저했다. 모든 언동은 신앙심에서 비롯됐다. 사생활에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오직 천주님의 가르치심대로 실천한 ‘성인’이었다”고 말이다.
때론 한 장의 편지가 주는 감동이 크다. 그가 6·25전쟁 중 미국에서 건축학을 배우고 있던 아들에게 보낸 서한이 그렇다. “현대 미국 최신 건축술도 배우고 특히 한국 실정에 맞는 건축을 전공할 것이니, 현재로서는 공장, 학교 건물 등이 긴급 요청된다. 네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언제나 건축 기술자의 안목으로 모든 면을 세부까지 연구·관찰하여라. 금년 여름방학에는 어느 건축가 사무실에서 조수 노릇하여 배워가며 학비도 버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너희들이 오직 겸손하고 건실한 주의 사랑을 받는 자 되기만을 기원할 따름이다.” 이 편지의 구절구절은 어버이 된 이들에게 자식의 앞길을 어떻게 인도하고 조언해야 할지를 곰곰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그의 삶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성직자 이상의 고결한 삶을 산 참 신앙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희유(稀有)의 가톨릭 정치지도자로서 그가 신앙공동체를 넘어 시민사회에 주는 깨침과 울림이 더 큰 까닭이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1959년 10월 26일, 민주당 구파와 신파는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과 장면을 내세웠다. 투표결과는 484대 481의 3표차에 불과했다. 조병옥이 후보 지명을 수락하지 않으려 하자, 그는 “한 표가 더 많아도 조 박사가 다수결로 지명 받았으니 수락해야 됩니다. 나는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협력해서 일합시다”라고 하여 포용의 큰 정치를 펼쳤다. 민주주의의 진수를 선보인 그는 당을 분열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뿐만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자택에 칩거하던 1964년 7월 그는 한통의 봉함엽서를 받았다. 9년 전 그를 권총으로 암살하려했던 이들이 보내 온 속죄와 보은의 편지였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에게는 의외의 4·19가 일어나자 박사님의 관대하신 은총으로 생명이 부활됐고, 1960년 12월 친히 오셔서 건네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여가며 살아온 불초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심의 가두와 광장은 여전히 권리만 주장하는 구호와 깃발이 그득하고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정쟁 소식만 들려오는 오늘, 그가 일찍이 보여준 포용과 관용의 정신은 우리의 앞길을 비추는 ‘또 하나의 리더십’으로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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