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피겨 스케이팅 올림픽 경기가 열리던 시간, 나는 길에 있었다. 급히 TV가 있을 만한 가게를 찾아 들어섰다. 김연아가 울면서 나오고 있었다. 넘어졌느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은 “아니요, 잘 했는데요”라고 했다. 그런데 왜 우냐고 거듭 묻는 내게 그 젊은이들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김연아도 그날 왜 울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몰입하고 난 이후의 비움이었을까?
100년만에 홀로 왕국을 이룬 소녀
한국에 근대적 스포츠가 보급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최말엽 대한제국 시대였다. 원래 피겨 스케이트는 유럽에서 1850년 부시넬이 금속제 날을 부착한 스케이트를 개발한 데에서 시작되었고, 그후 10여 년 뒤 발레 교사였던 헤인즈가 예술적 동작을 첨가하여 만들어진 스포츠이다. 피겨 스케이트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1890년대였다. ‘빙족희’(氷足戱)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국왕 고종과 왕비를 모시고 외국인들이 경복궁 향원정에서 시범공연을 했다. 왕비는 내외의 법도를 지켜서 발을 치고 그 뒤에서 구경했는데, 남녀가 함께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모양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고 전한다.
이후 100년간, 한국은 피겨스케이팅에서는 변방이었다. 스피드 스케이트는 1910년대 보급되었고, 20년대 들어서는 빙상 선수권대회도 열렸다. 그러나 피겨는 1924년 일본 유학생이 귀국하여 ‘피겨 스케이트 구락부’를 비로소 만들게 되었다. 이 클럽은 8명으로 시작해서 차차 회원이 늘어 남자선수들끼리 페어나 아이스 댄싱도 하게 되었다. 1930년대 학교를 중심으로 피겨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여자선수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하얼빈이나 북경 등지에서 피겨를 배운 여자 선수들이 귀국해 활동했다. 피겨 선수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완공된 것은 1964년이었다. 김연아는 이런 곳에서 혼자 세계적 왕국을 지었고, 세계 피겨 100년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기 시작했다.
하느님, 어떻게 우릴 안으실까?
피겨는 얼음판 위에서 점프를 하고, 점프와 점프사이를 잇는 경기이다. 그 점프기술과 예술미를 구사하기 위해 한 선수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한 번의 비상을 위한 천 번의 점프’라는 말이 대신한다. 죽음의 무도에서처럼 스케이트 날을 세워 얼음을 콕콕 찍는 소름 돋는 스텝 등 기술과 음악의 표현을 하나로 하여 ‘빙상 위에서 춤추는 물방울’이 되려면 생활 전체를 그곳으로 몰입해야 한다. 정신 속까지라도 군더더기가 있어서는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동작은 인간의 몸이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까지 전달해 준다. 그 몸의 절제가 인간의 삶까지 풀어낸다.
김연아는 그 몰입을 자신의 코치 브라이언 오서와 함께 이루어냈다. 오서는 김연아가 도약할 때 주먹을 쥐고 있다가 성공하면 손을 번쩍 든다. 또 때로는 그도 스케이트장 펜스 밖에서 함께 뛰어 오른다. 혼신을 다해 몰입해서 경기를 하고 그 순간적인 빈 상태로 돌아오는 작은 새에게 코치는 “와우”만 연발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가 울면서 안길 때 등을 두드리는 모습은 그들이 함께 한 힘을 느끼게 한다.
마치 하느님이 우리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게 한다. 이 세상을 혼신을 다해서 힘들게 이기고 돌아가면, 주께서도 그렇게 팔 벌리고 계실 것만 같다. 우리가 세상에서 비상하기 위해 수없는 점프를 할 때 하느님도 브라이언 오서처럼 마음조리고 우리와 함께 뛰고 계시리라.
우리사회, 무엇을 위해 몰입할 것인가?
김연아는 거의 얼음판 위에서 자신의 성장기를 보냈다. 그렇다고 우리는 김연아가 사회생활을 못할까봐 염려하지는 않는다. 단 한번도 얼음 위에서 뛰어본 적이 없는 우리가 그를 이해한다. 내용을 모두 알아서가 아니다.
진정한 혼자의 길이야말로 모든 쓸데없는 군살을 버리게 한다. 그러므로 무엇엔가 전념할수록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다. 자신을 깨닫고, 자존의 세계를 세우기 위해 힘들어 본 사람이라면 대화는 더 쉽게 열린다. 버리지 못하면 듣지 못한다. 듣지를 못하고 자기 말만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우리는 독재자를 싫어한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한 우리 모두는 자신이 관여하는 범위 안에서 독재자일 수 있다.
여러 가지가 얽히기만 하는 우리 사회가 ‘현재’ 속으로 골몰해 들어갔으면 싶다. 욕심, 관계, 과거 등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부차적이며 군더더기이다. 모든 군더더기를 털고 너와 나의 소통을 위해 지금 뛰어 오르자. 매순간 있는 힘을 다해 솟구치면, 우리가 솟을 때마다 하느님도 불끈 힘을 주고 지켜보시리라. 만약 털어내기가 억울하면 울면서 솟아오르자. 골몰했던 세상을 끝내고 그분 품에 안기면, 그분은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기뻐하시리라. 우리가 김연아가 전설을 만들기를 원하는 것처럼 주께서는 우리가 전설이 되기를 바라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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