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乙丑)년 새해 아침이 밝았다. 암흑과 고요에 잠긴 대지를 밝히며 새날의 태양이 떠올랐다. 지난날의 모든 악과 허물을 영겁의 눈더미 속에 파묻고 찬란한 새 아침을 밝혔다.
이 세상 어느 누구의 간섭도 제재도 받음이 없이 85년 첫날이 도도히 그 웅자를 드러낸 것이다.
새 아침과 더불어 만물은 생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살아있기에 새 아침은 의미가 있고 삼라만상이 나와 관계가 있어진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나와 새해의 새날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가 있음으로해서 이 세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나와 이 세상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음이 분명하다. 이 세상이 없는 나를 생각할 수 없듯이 나없는 이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기에 나와 이 세상은 분리시킬수 없는 것이며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좋든 싫든 이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 인간에게 이처럼 숙명적인 삶을 부여했단 말인가. 자신의 의사로 태어나지 못했으며 죽지않고 무한정 살고 싶은데도 죽어야만 하는 인간、그 인간의 삶은 누가 지배한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곧 생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생명은 물론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그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어떤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에 틀림 없다. 나의 생명이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어졌다는 사실、그리고 그 생명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끝난다는 사실、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이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하고 아집(我執)과 착각에 사로잡혀 이 엄연한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데 바로 온갖 악과 죄가 돋아나는게 아닌가?
나의 근본 그 자체인 생명을 아무런 댓가없이 부여받았다면 내 삶은 시작부터 공짜로 출발한 것이 아닌가? 누가 자기의 생명을 돈이나 권력으로 사들인 사람이 있으며 그 위력적인 돈이나 권력의 힘으로 죽지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의 생명이 공짜로 주어진 것이라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것… 돈도、명예도 권력도、지식도 진정 내것일 수는 없다. 나는 오직 그 소유물의 관리자일 수 밖에 없다. 내게 생명을 주신분이 바로 주인이시고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실상은 어떠한가? 그분의 것을 마치 자기의 것인양 움켜쥐고 앉아 나눌줄 모르는 무리들、더 가지기위해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공갈ㆍ협박하고 짓누르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위해 다른 이를 짓밟고 심지어는 이목구비(耳目口鼻)를 틀어막는 사람들、이웃의 불행이나 굶주림을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양팔끼고 앉아 콧노래를 부르고있는 점잖은 사람들、과연 이들은 어디서온 인간들일까? 나개인은、또한 우리들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반성해보자.
이런류의 인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정의도 인정도、사랑도 메말라 갈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폭력과 비리、불신과 몰인정이 판을칠 뿐이다. 뿐만아니라 그런사회는 희망도 없으며 기대를 걸 미래도 없다.
희망찬 새해 새아침에 꺼내기는 좀 죄송스럽긴 하지만 작년 12월 22일 현재 한국내에서 한해동안 일어난 살인ㆍ강도ㆍ강간ㆍ방화 등 각종 강력 사건은 8천여 건이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살인사건은 5백여건으로 하루평균 1.4명이 남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또 지난해에는 이디오피아의 극심한 가뭄으로 수천만명이 굶어죽은 비극외에도 유엔 국제아동구호기금(UNICEF)이 밝힌 보고서에 의하면 아시아、아프리카、남미 등지에서 아주 간단한 기초적인 의료서비스를 받지못해 하루 4만명꼴로 매년 1천 5백만명이 숨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지난해에는 전쟁과 각종 테러행위 가스누출사고 등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계도처에서 죽어갔는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짓밟는 행위는 이미 인간적일 수는 없다. 그것은 비인간적(非人間的)이며 야수적(野獸的)일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 이미 인간의 품위를 상실한 것이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 받을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인간에게 있을수 있겠는가?
김수환 추기경은 구랍 21일 가진 연말기자회견에서『인간성을 잃고나면 모든 성취가 아무 소용 없는것』이라면서『이웃형제들을 인간으로 존중하고 사랑했는가를 반문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찾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 한다』고 말했다.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인간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의 길이다. 그 길만이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징표가 될것이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온갖 악들은 본래 우리 자신의 마음에 뿌리박고 있는것…사랑은 우주에너지 가운데서 가장 강렬하고 신비로운 힘』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인간은 죄악도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랑도 바로 그 안에서 나온다. 인간이 마음먹기에 따라 마음속에서 사랑을 꺼낼수도 있고 반대로 탐욕과 증오와 온갖 악을 꺼집어낼수도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이 남아있다. 과연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꺼낼 것인가? 탐욕과 교만과 증오의 길을 고집함으로써 자멸의 길을 택할 것인가、아니면 사랑과 용서와 나눔으로써 삶의 길을 택할 것인가? 선택은 물론 자유이다. 새해 새아침에 용단을 내리자. 나와 우리가 함께 살아남을 것인가、아니면 나와 우리가 함께 멸망할 것인가를….
마침 금년은 소(牛)의 해이다. 사람서리에서 배울것이 없으면 이성이 없는 짐승한테서라도 배우자. 묵묵히 속이지않고 탐욕도 불평도 없이 주인의 명령에 오직 순종하며 열심히 일하는 그 태도를 배우자.
우리교회는 화려하고 영광된 2백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희망찬 3백년대의 첫해 첫아침을 맞았다. 먼저 우리들만이라도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갖자. 새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자. 그러기위해 먼저 우리의 머리와 마음속에 남아있는 악의 찌거기를 말끔히 불태워 버리자. 누구의 잘못으로 탓을 돌리지 말고 자기할일을 충실히 하자.
나 스스로 먼저 인간성을 잃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새 출발하자. 내 양어깨에 이 민족의 앞날이、이 겨레의 운명이 지워져있음을 잠시도 잊지말자. 그리고 용감히 외치며 나아가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땅을 새롭게 할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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