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떨쳤다. 삼성의 움직임 하나가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했다. 얼마 전 삼성이 추진하려다 풍파만 일으키고 취소된 ‘총장추천제’ 이야기다. 한 회사의 신입사원 채용방식이 이토록 나라 전반의 여러 문제를 들춰내다니. 삼성의 영향력에 새삼 놀라면서 마음 안에 씁쓸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번 삼성의 총장추천제는 나름 긍정적 의미를 지닌 발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4년여 기간 동안 교육을 담당해온 대학이 인생관·가치관·리더십·의지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추천한다면 분명 훌륭한 인재가 선발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삼성의 신입사원 공채로 인한 과도한 비용을 개선하는 의미가 있다고도 한다. 아예 공채 제도 자체가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는 주장도 있다. 저임금의 인력 투입만으로도 성장이 가능했던 저가 경쟁시대에는 범재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는 직무별 전문성을 갖춘 맞춤형 인재 확보가 승부를 가름하는 시대라는 판단이다. 이참에 기업이 신입사원을 재교육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학교육이 맞춤형 인재 양성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소리도 나온다.
반면 삼성의 총장추천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번 조치가 지닌 차별적 요소를 문제 삼는다. 삼성이 추천인원을 대학별로 할당함으로써 대학서열화가 조장되었다는 지적이다. 전체적으로 대학의 순위가 매겨진 것 이외에도 여대에 할당된 인원이 적다는 점, 영호남 지역 대학 사이의 비율이 편파적이라는 점 등도 거론되었다. 나는 이들 찬반 논의에 깊이 뛰어들 의도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번 소동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이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학의 추천이 훌륭한 인재를 효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다는 판단에 대해서 과연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내실과 공정성을 지닌 추천제가 가능할지 회의적이다. SSAT로 인한 과도한 사회적 비용 문제에 대해서는 애당초 유별난 선발시험을 내세운 삼성의 독선적 태도가 거슬린다. 이번 조치의 차별적 요소를 지적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분명 공감하지만 자칫 또 다른 (반대편의) 차별을 초래하는 문제 지적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이번 삼성의 총장추천제 포기를 안타까워하는 반응에 내내 신경이 쓰인다. ‘이제는 범재가 아닌 전문성을 갖춘 맞춤형 인재 확보가 승부를 가름하는 시대’라는 냉혹한 판단이 마음 한 구석을 서늘하게 한다.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다원화 고도화 시대라는 현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그늘에서 사그라지고 있는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기업이 신입사원을 재교육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학교육이 맞춤형 인재 양성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마음이 답답해진다. 대학이 직업학원이 되어가고 있다는 비판을 들은 지 꽤 되었다. 대학이 기업에 종속되었다는 자조적인 말도 많이 듣는다. 대학이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여 키워내려는 인재와 현실적으로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가 과연 그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
이번 삼성의 총장추천제 소동은 이 시대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들춰냈다. 무엇보다 이 세대가 지나친 경쟁과 성과 위주의 흐름에 휩싸여있음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모두가 한 쪽만 바라보며 치닫는 속에 정작 무엇이 중요하고 옳은 것인지 잃어버리고 있다. 다시 공은 우리 각자의 손에 쥐어졌다. 이 세대에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특히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인 신앙인으로서. 막막한 심정이지만, 그럴수록 신앙인으로서 더욱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식별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를 얻어 마땅히 간직해야 할 것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며칠 전 독서 말씀이 유독 마음에 들어온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열왕기 상권 3,11-12)
오지섭 교수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서강대, 가톨릭대, 한신대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 서강대 종교연구소 책임연구원, 종교학과 대우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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