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초 바티칸으로부터 한국 교회가 청원했던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이 확정됐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초기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시복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1925년 7월 5일에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1968년 10월 6일에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됐다.
그때 복자가 된 103위는 1984년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주재로 시성됐다.이번 124위 시복 결정은 한국 천주교회가 자력으로 시복청원을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교황청 시성성에 시복청원서를 공식 접수한 지 5년 만에 열매를 맺었다. 앞서 두 번의 시복 당시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서한, 문서 등 사료가 풍부했지만 이번에는 한국교회가 보유한 사료도 적었고, 시복 추진이 처음이라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시복시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순교 사실과 덕행에 관한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며, 증거를 검토하고 확인하는 엄격한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 신자들의 기도는 물론 한국교회의 수많은 신학자와 역사학자, 교회법 학자들의 역량이 총동원되었으니 한국 교회 전체의 노력으로 시복이 이뤄졌다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 후배 사제에게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최근에 124위 시복식이 확정되었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이 시복 관련 내용을 잘 몰라 혼란을 겪을 것이 걱정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현재 시복 추진 중에 있는 분들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기도의 필요성도 덧붙였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 신부님이 설명한 한국 천주교회 시복 준비현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은 확정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순교자가 아니기에 124위와 다른 안건으로 추진 중에 있며,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청원을 준비 중에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 38위’가 있다. 이들은 6·25 전후로 함경도 일원에서 순교한 베네딕도회 주교와 신부, 수사, 수녀들이다. 이분들에 대한 시복청원 준비는 베네딕도회에서 독자적으로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6·25 전후로 서울대교구와 평양교구를 비롯한 기타 교구에서 순교하신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도 있다. 이분들은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로 역시 시복청원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평양교구는 전쟁 직후부터 홍 주교님과 평양교구 사제들,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의 희생을 순교로 보고 피난민들 안에서 기도운동을 시작했다. 1968년부터 이미 사제와 평신도들이 전국을 다니며 증인들을 찾아 자료를 수집했고, 각 인물에 대한 개인적 자료도 상당수 수집하여 이번에 시복청원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모범이 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시복시성 청원과 성사되는 과정에서 인물에 대한 역사와 증언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증인들도, 사료도 많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제부터라도 더 많은 순교자들의 사료와 증인들의 확보에 정성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며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 명언은 우리 교회에도 적용된다. 교회의 역사를 모르고 어떻게 교회를 알고 사랑하겠는가.
우리에게 시복시성은 어쩌면 신앙의 선조들에 대한 의무이다. 신앙은 전해지는 것이다. 그분들의 신앙의 맥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흐르고 있어야 한다. 사실 순교를 당하시고도 사료와 증언이 부족해 시복시성이 되지 않은 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순교자들이 교회뿐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에서 바르게 평가되는 것에도 많은 노력과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 순교자들은 신분제도를 넘어선 이웃 사랑을 통해 인권 신장과 한국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되는 길이 아닐까. 우리 교회는 이번 124위의 시복을 여러 면에서 새로운 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앙선조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허영엽(마티아) 신부는 1984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본당사목과 성서못자리, 교구 문화 홍보국장을 거쳐 현재 서울대교구 교구장 수석비서로 교구 대변인 역할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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