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모처럼 흐뭇해지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답답하고 짜증나는 소식이 대부분인 요즘 세상이어서인지 더욱 기분 좋게 느껴졌다. 고려대학교 학생들 사이에 시작된 새로운 기부 문화 ‘착한 밥약’ 이야기다. ‘착한 밥약’이라는 제목부터 참신하고 귀엽다. ‘밥약’이란 ‘밥 먹는 약속’을 줄인 말이라고 한다.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밥을 얻어먹은 후배들이 적은 금액이라도 기부금을 낸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밥이나 술을 사달라고 조르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풍경이다. 특히 갓 입학한 새내기들은 마치 당연한 권리인 듯 선배들을 압박(?)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선배 입장에서는 새내기들이 귀여워서 혹은 모종의 의도를 위한 밑밥 삼아 밥을 사기도 했다. 어쨌든 그리 과하지 않게 관행처럼 이어오고 있다.
관행처럼 이루어지는 일이니 사실 아무렇지 않게 얻어먹고 끝나도 될 일이다. 굳이 보답을 하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 없다. 그런데 후배들도 조금이나마 답례를 하겠다고 나서는 마음이 갸륵하다. 더욱이 자신이 받은 것을 또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형태로 이어가겠다니 그 발상이 생각할수록 대견하고 기발하다. 요즘 젊은이들을 걱정하는 어른들도 있지만, 그래도 역시 젊은이의 순수하고 창조적인 힘을 확인할 수 있어 기분 좋다.
올 신학기 초에 처음 제안이 이루어져 아직은 고려대 안에서 몇 개 학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치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모아진 기부금도 그렇게 큰 액수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작은 움직임이 점차 더 넓고 더 크게 번져나가리라는 기대를 지니게 된다. 지난해 12월 고려대의 한 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내걸은 대자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일을 기억한다. 한 사람에게서 시작한 작은 일이지만 그 안에 간직하고 있는 뜻이 순수하고 깊다면 결국에는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큰 일로 퍼져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것으로 시작한 큰 변화’가 결국 우리 사회를 좀 더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 것이다.
나는 요즘 가톨릭대학교 김수환 추기경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시민교육과 청소년 인성교육이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 시민교육 프로그램은 몇 가지 세부 주제로 구성되는데, 나는 ‘평화’에 관한 내용을 강의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실천적 삶을 통해 진정한 평화의 의미는 무엇인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천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김수환 추기경이 강조했던 진정한 평화는 추상적이거나 내세적 의미의 평화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평화이다. 좀 더 실제적인 의미로는 ‘모든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상태’가 김수환 추기경이 생각했던 참된 평화이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받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평등이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은 모든 이를 위한 사랑의 실천, 특히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러한 사랑의 실천 역시 구체적이고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김수환 추기경 자신이 보여준 삶의 모습에서 이 핵심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듯이 김수환 추기경은 만나는 사람 모두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미소와 배려의 마음으로 세상 사람을 대했다.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일상적 모습은 언뜻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굳은 표정, 퉁명스러운 말, 비방과 험담, 상처주기 등 우리들이 흔히 하고 있는 일상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결국 김수환 추기경이 보여주었듯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구체적 실천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평소 소홀히 했던 일상의 작은 일들이 큰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나로부터의 작은 변화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오지섭 교수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서강대, 가톨릭대, 한신대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 서강대 종교연구소 책임연구원, 종교학과 대우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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