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반도 분단 이후, 북한이탈주민은 지속적으로 존재했으나 그 수는 미미했다. 그러나 1990년대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과 잇단 자연재해는 수많은 ‘아사자’를 발생시켰고, 이 시기 ‘고난의 행군시기’ 이후 탈북자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한국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2만6124명이다. (통일부, 2013)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도문지역(연변)으로 탈북하여, 제3국을 통해서 한국에 입국하게 된다. 또한 목선 등을 이용하여 바다를 통하거나 군복무 중에 비무장지대를 넘어 입국하는 경우도 일부 있으나, 이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이탈주민은 전국 16개 시·도에 다양하게 거주하고 있으며, 특히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지역에 65%가 거주하고 있다. (2013년 6월 기준) 서울시의 경우, 양천구·노원구·강서구에 서울시 전체의 약 50%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북한이탈주민에게 임대아파트를 지원하는 주거지원제도와 연관성이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의 인구사회학적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0년대까지는 여성의 비율이 12%정도였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는 70%까지 증가했다. 이는 탈북 이후 중국 등지에서 체류 시 여성이 더 용이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연령은 30대(30.6%), 20대(27.4%), 40대(16.5%), 10대(11.7%) 순으로 3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젊은 연령층(86.2%)의 비율이 매우 높다. 이는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해하는데 비교적 용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인적자본을 개발하고 축적할 수 있는 정착지원 제도의 설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입국당시의 학력은 70%정도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전문대 이상의 대학졸업 학력을 가진 경우도 16.2%로 나타났다. 또 당시의 직업별 유형은 ‘무직부양’이 50.6%로 가장 높았으며 노동자가 24.4%로 두 번째로 높게 나타났으며, 전문직 및 관리직, 군인, 예술 분야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무직부양’은 근로능력이 없어 특정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 부분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북한에서 장마당 등의 비공식적인 일자리에서 생계 및 가계를 이끌어가기 위한 활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들의 탈북 배경은 시기별로 차이가 있는데 1990년대 이전에는 주로 고위층 및 높은 학력을 가진 경우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탈북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입국자들은 식량난 때문에 살기 위해서 탈북한 경우로 평범한 북한주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당초부터 한국에 오기 위해 탈북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중국 등지에서 체류하는 과정에서 한국 입국을 결정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탈북의 배경도 과거의 ‘난민적’ 성격이 강했다면 최근에는 ‘이민자적’ 성격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가 북한이탈주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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