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주례를 맡아주셨던 신부님의 좌우명은 “밥값하자!”다. 신부님은 “밥값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밥은 일인분 꼭꼭 챙겨 먹으려 든다”며, 사목자든 일반 신자든, 대통령이든 일개 국민이든 자기 본분의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살아야 함을 강변하셨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서 밥값 한다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니냐” 싶지만,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밥값 제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회의가 들 때가 많다. 특히 직업상 해야 할 일과 실제 삶 사이의 괴리가 심한 사람의 경우도 자주 만난다.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남성이 상담을 청해 왔다. 아내가 외모도 아름답고 하는 행동이 사랑스럽다며, 휴대전화에 담긴 아내의 사진까지 보여 주었다. 그런데 자녀들 앞이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내담자는 아내의 결함을 지적하거나 비난 투의 말을 자주 해서, 아내는 이제 아예 남편과 마주하기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이 내담자는 의사다. 몸이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사랑과 치유를 가장 필요로 하는 배우자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말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지인이 운영하는 유치원의 25세 교사가 얼마 전부터 몸이 아프다며 지각과 결근이 잦더니, 갑작스레 두 달간 휴가를 쓰겠다고 통보했다. 진상을 알고 보니, 그 교사가 아기를 낳은 것이었다. 워낙 마른 체격이라 요즘 들어 살이 좀 쪘나 싶을 정도였지, 만삭의 임신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기 아빠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몇 년 째 임용고시를 본다, 공무원 시험을 본다는 식으로 무위도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어린 나이도 아니고 아기를 낳기로 작정했을 때는 그에 걸맞는 책임을 지기로 결심했으리라. 인간의 인생 주기에서 미취학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시기에 부모와 더불어 아이를 보살피고 훈육하는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든 교육, 심리학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고 있고, 그 교사도 아마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축복 속에 태어나야 할 아기의 존재를 부모에게나 동료 직원에게 감추어야 했던 이 교사에게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될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앞으로 아기 아빠와 함께 이 문제들을 책임 있게 해결해 가기를 기대해 본다.
인간 신체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지만 배우자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의사, 아이를 보살피고 훈육하고 있지만 자신의 아기는 부정하고 있는 유치원 교사에게 직업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직업의 3 요소는 자아실현, 경제적인 수익, 사회적인 의미라고 한다. 위 사례의 당사자들은 직업을 수익을 가져다주는 일, 소위 ‘밥벌이 수단’으로만 간주할 뿐, 아마 직업의 사회적인 의미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해 본 적이 없지 않을까.
지난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로 3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사고야 발생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이 사고를 보며 많은 시민들이 분노한 이유는 인명구조가 본분의 일인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또 소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공직자들, 권력의 오남용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 시민들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할 사목자들이 ‘밥값’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마다 자신의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원리, 믿음, 신념, 즉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며, 가치관은 오랫동안 지속되거나 자주 변하지 않는다. 가치관 교육은 가정이나 학교, 사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져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가치관 교육에 소홀해 온 측면이 없지 않다. 직업 가치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무슨 일을 하는 게 의미 있고 행복한지 성찰해 본 경험도 거의 없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물론 적절한 선택을 할 때도 부적절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자신에게, 또 맺고 있는 관계에 곧 부정적인 영향을 낳는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자각한다면 만회 가능하고, 그런 만큼 성장한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필자 부부의 주례 신부님의 생활 모토인 ‘밥값하자!’는 사회 구성원인 우리 각자가 자신의 가치관을 부단히 살피고, 그 가치관을 생활에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의미 있는 생활을 꾸려 나가자는 가르침이 아닌가 한다. ‘하루 하루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제대로 밥값을 하고 있는지’ 일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성찰해 볼 일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