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법은 사건의 진실보다 법리를 따진다. 특정인이 살인범이라고 느낄 정황이 충분하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벌을 주지 못한다. 우리 법이 택하고 있는 법정 증거주의는 억울한 죄인이 생기지 않도록 방어벽 역할도 하지만, 때로는 피해자의 한과 피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모순을 초래하기도 한다.
지난 7일 공소 시효가 만료되는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사건의 유가족이 용의자에 대한 고소장을 검찰에 제시, 재정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 시효가 중단된 90일 동안 범인이 잡힐지 주목거리다. 피해자 고(故) 김태완(6)군은 아침을 먹고 학습지를 공부하러 나섰다가 집 앞 골목길에서 누군가로부터 백주에 황산 테러를 당했다. 몸의 40%가 3도 화상을 입었는데다 입에 황산을 붓는 바람에 식도와 기도까지 손상됐다. 증언조차 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살인의 고의성이 명백한 범죄자가 사건 이후 15년 동안 거리를 활보한다는 사실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하고 있다.
황산으로 온 몸이 녹아버려 죽어가는 몸으로 태완이는 증언을 남겼다. “아는 아저씨야.” 태완이는 특정인을 수차례 지목했고, 같이 있던 태완이의 친구 인수도 동일인을 가리켰다. 하지만 경찰은 일상적인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 인수를 ‘의사전달이 불가능한 저능아’라며 외면했고, 태완이 증언은 엄마가 유도했다고 거부했다.
그런데 두 아이의 증언은 희안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범인이 검은 봉지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이 저능아로 분류했던 인수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는데, 지금도 검은 봉지를 든 사람을 무서워한다. 생전에 남긴 녹취록에서 태완이도 범인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었다고 했다.
엄마 : 하얀 통이더나?
태완 : 봉지
엄마 : 봉지 안에 들었어?
태완 : 응
엄마 : 봉지 어떤 색깔이던데?
태완 : 까만색
학교 다닐 때 황산은 움직이면 열이 발생되고, 물만 확 부어도 폭발한다고 배우면서 과학실험실에서는 묽은 황산이 든 비이커에 유리 막대를 대고 조심스레 물을 따랐던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다. 그런데 두 아이는 범인이 비닐 봉지에 담아왔다고 입을 모았다. 녹아내릴텐데…. 실험해보니 애들의 말이 맞았다. 마치 물처럼 안 녹고 그대로 있었다. 태완이도, 인수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태완이 부모는 지난 15년 동안 범인을 잡기 위해 뛰어다녔다. 태완이와 인수가 진술할 때, 범죄심리학자나 아동심리학자 혹은 법의학자가 함께 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매스컴이 이 사건을 처음부터 찬찬히 분석하고 추적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는 큰 회한에 젖는다. 사고를 당하거나 목격한 아이들의 증언을 수사기관에서 묵살하는 것은 정당할까?
스웨덴 룬트 대학의 구닐라 프레딘 교수팀은 어린이의 증언과 관련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프레딘 교수는 8~9세, 11~12세, 성인 등 3그룹을 대상으로 정보 인지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8~9세 아이들은 다른 두 그룹에 비해서 세부적인 기억은 떨어졌으나 정보 자체는 정확하게 기억했다. 어릴수록 한번에 많은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용을 왜곡시키지 않는다는 결과였다.
국내 심리학계의 대부 장현갑(영남대 명예교수)박사도 “애들은 속이지 않고, 세상을 보는 게 투명하니까. 기억 속 잔영을 부풀리거나 축소하지는 않는다”고 들려준다. 애들 기억이 어른보다 훨씬 맑다는 것이다. 사(邪)가 깃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프레딘 교수의 실험 대상보다 태완이와 인수는 두어살이나 더 어리다. 태완이의 목숨과 바꾼 증언은 묵살보다 적극적인 뒷받침이 필요했다고 보여진다.
나쁜 아저씨가 일부러 얼굴에다 뜨거운 거를 부었다고 진술한 태완이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지 못하는 한,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훤한 낮에 집앞 골목길에서 생명을 테러당한 지역사회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그를 추적하여 밝혀내려 더 노력하지 못한 언론인으로서 무한 책임과 자괴감을 느낀다. 미안하다, 태완아!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