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골 공소를 접한 지가 벌써 12년이 되었다. 이곳으로 귀농을 하고서야 공소가 어떤 곳인지, 공소 역사와 함께 제대 벽에 그려져 있는 색 바랜 벽화의 내용도 알게 되었으며,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본당이 있음에도 공소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이유도 알아가고 있다. 신시가지에 거주할 무렵 밀려오는 교우들을 감당하지 못하여 비닐하우스 본당에서 전쟁 치르듯 또 다른 본당을 분가 하는 모습을 보다가 산골로 귀농한 나에게 시골의 공소는 충격이었다. 유모차에 의지하여 힘겹게 예절에 참여하시는 노약한 할머니와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종탑의 종은 과연 몇 년을 버티어 갈 수 있을까. 곧 나도 함께 노인네가 되어 그렇게 퇴색되어 갈 것 같았다. 내가 적을 둔 이 화동공소도 색 바래어 가는 농촌의 면 소재지와 구색이라도 맞추듯 벽면은 퇴색되어 칠이 벗겨지며 곰팡이로 도배되었고, 바닥 널마루는 50여 년을 힘겹게 버티어 오고 있으며, 마당에는 신심 깊은 할머니들이 갖고 온 풀꽃들이 저마다 빼어난 위치에 자리 잡다보니 잡초와 함께 온통 잠식되어 겨우 사람 다닐 통로만 열려 있는 실정이었다.
공소예절이 없는 평일에는 겹 댄 합판으로 아귀가 맞지 않아 제대로 닫을 수 없는 현관 출입문과 함께 폐가의 스산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고, 힘겹게 버티어 가는 농촌 현실이 공소 앞마당에 한 발 먼저 와 있었다. 작은 것이 큰 것에 예속되듯 몇 년 지나지 않아 공소도 본당에 흡수되리라 생각되었다. 물론 시골 본당도 가난하여 자립은커녕 공소에 도리어 짐이 되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도시 본당이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가끔씩 농산물을 싣고 방문 판매하는 도시 성당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생소함에 나 자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언제나 농민은 자기 몫 이상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없어 보채는 아이가 되어야 했고, 쌀 한 톨 생산하지 않는 도시에 자존감까지 내어놓고 주눅 들며 살아야 한다. 농촌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 자매님들이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해야 하는 실정에 고마움과 미안함보다는 암담함이 먼저 몰려 왔다.
그래도 귀농 첫해에 새로운 교우가 왔다고 기뻐하는 형제자매님들의 모습들과, 아무것도 모른 채 포도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굵어져버린 포도알로 인해 서로 밀려 찢어지는 포도송이를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 바쁜 와중에도 본인 일 제쳐두고 빗속에 달려와 포도 알솎기를 도와주던 공소 할머니 할아버지. 그 고마움에 몰래 눈물 흘리면서 작은 공소 생명공동체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공동체이지만 가난을 모르고, 조그마한 공동체이지만 큰 것을 구하지 않고,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하면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볼 때 안동교구 사명선언문 ‘기쁘고 떳떳하게’가 내 마음속에 온전하게 자리를 잡아 가게 되었고, 내가 시골 공소로 오면서 가졌던 여러 생각들이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때 이른 은퇴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사회불안감이 가중되지만 매년 오는 가톨릭 대학생들의 농활과 선교사님들의 농촌 선교활동, 수사님들의 고행 수련 기간을 이 조그마한 공소에서 함께 하며, 언젠가부터 귀농·귀촌 바람과 함께 공소에도 늘어난 젊은이들이 함께 하게 되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됐다. 주일 아침 서로의 안부인사와 함께 분주함이 함께 묻어나고 있으니 공소 마당이 다시 넓어지고 조용한 시골의 이른 아침이 공소에서 울려 퍼지는 사람 소리로 북적이는 모습을 보면 농촌과 공소를 예찬하고 싶어진다.
이름 모르는 은인이 공소에 지속적으로 보내주시는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은 아직까지도 즐겨 읽는 외부소식이고, 공소 예절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미력이나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푸는 큰 쌈짓돈과 젊은이들의 품을 모아 마당정리를 하고, 합판문 교체하고 일 년 쉬고 창틀 몇 개 갈고 몇 년 쉬어 지붕수리를 해야 하지만, 올해는 어느 형제자매님이 새로이 와서 매력을 발산할까 기대하면서 매년 새로운 공소 가족을 맞이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어 가고 있다.
이홍재씨는 서울대 조경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건설에서 조경업무를 담당하다가 2003년 귀농, 현재 상주시 화동면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부회장, 햇살아래환경영농조합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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