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장래 꿈이 영화감독인 탓에 새로 나오는 영화는 다 봐야 하는 아버지 신세로, 특히 한국 영화는 빼놓을 수 없다. 한국사 최고 영웅인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삼은 ‘명량’을 관람하게 된 경위도 이러하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이미 다 아는 내용에 별 무엇이 더 있겠느냐 싶은 마음으로 관람을 했다.
주연 배우의 인상 깊은 연기와 명망있는 감독의 연출력은 그렇다 해도 식자행세로 오늘을 사는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부끄러웠다. 자신을 감금하고 고문한 선조에 대해 충성을 강조하는 이순신 장군에게 공의 아들이 따져 물었을 때,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쫓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장군의 대답에 목이 메었다. 필시 사실을 바탕으로 감독이나 각본을 쓴 이가 다듬은 말일 테지만 요즘 이 무기력한 세상에 한 줄기 맑은 풍경소리 같은 울림이었다.
성웅으로 불리는 한민족사 영웅의 위상 마냥 많은 사람들이 관람할 기세다. 마침 ‘군도, 민란의 시대’라는 영화를 전 주에 본 터다. 몰아치는 흥행 열풍이 심상치 않은, 연 이은 사극의 돌풍이다.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의 배경은 조선 지배세력과 기득권층의 무사안일과 부패, 그 결과로 나타나는 백성의 고통이다. 진실은 왜곡되고 정의를 부르짖는 자는 처단의 대상이며, 오로지 힘있는 자가 옳고 그름을 판정한다. 힘이 없다는 것은 원죄일 뿐이다. 한 영화는 뭉치지 않으면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민초의 기약 없는 항변이고, 또 한 영화는 지배계층이었던 한 선각자의 고독한 싸움을 그리고 있다.
영화를 본 뒤 통일문제로 밥술을 뜬지 20년이 되어가는 필자는 심사가 편치 않다. 굶주림과 처형이 일상사인 북녘에서 형제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나라가 반으로 갈라지는 남남갈등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200만 명에 달하는 남북한의 청년들이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이다.
장군이 목숨 버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남북이 있었을 리 없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남북한의 청년들 중 필시 누군가는 이 충무공의, 또 누군가는 광개토대왕의 핏줄일 것이다. 긴 한민족사에서 분단은 순간이고 이념간의 증오는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 21세기 지구촌 시민사회의 시대에 다시 구태의연한 민족주의의 감성을 들추자는 것이 아니다. 시대착오적인 이념논쟁에 시달리고, 아직 민족국가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자책이다.
한민족사 최대의 분열기인 후삼국 시대 45년보다 더 긴 시간을 우리는 갈라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 통일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실현해야 할 우리시대의 의무이다. 장군에게 부끄러운 한 여름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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