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학생들의 집단지도를 위해서 ‘선행단’이라는 준거집단을 조직해서 운영할 때의 일이다. 웃음을 잃어버렸던 한 여학생이 복장이 깔끔해지고 행동도 명랑한 학생으로 변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도 종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날 방과 후에는 다음 월요일에 자기가 학생들 앞에서 경험담을 발표하겠노라며 나를 찾았다. “아니 요즘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생활에 활력이 넘치니?”하고 묻는 나에게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선생님, 사랑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요. 이제는 친구들도 아주 좋아졌고요, 공부도 재미있어 졌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자랑스럽게 자기 경험을 들려주었다.
고아원 수녀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어린이는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었다. 학용품도 선물하고 공부도 돌봐주며 같이 놀아주기도 했지만, 말이 없고 표정도 어두운 것이 마음에 걸려서 선물하는 필통 속에 편지를 남겨주고 돌아왔다.
“나는 네가 친동생처럼 귀엽고 좋은데, 내가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가 싫으면 이 필통 속에 넣어둔 내 주소와 봉투, 우표를 이용해서 편지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단다.
그런데 다음 번 방문 때까지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 여학생은 도착하자마자 그 어린이를 가까운 학교 놀이터로 데리고 가서 사랑을 다해서 그네를 밀어주며 만날 수 없었던 며칠 동안 지낸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그런데 그 어린이는 자기가 고아원에 오게 된 경위와 자기와 헤어져서 어디론가 다른 곳에 가 있을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며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차츰 그 어린이의 심정이 되어 함께 울었고 “그럴수록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네가 유명해지면 네 오빠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해줄 수 있었다.
그 학생은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울었다. 처음에는 그 어린이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어딘가에 살고 있을 오빠를 보고 싶어 하는 애타는 마음을 동정해서 울기 시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울다가 생각하니까 바로 자기 서러움으로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여학생은 홀로되신 엄마와 오빠, 이렇게 세 식구가 아빠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아주 단란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가 결혼 한 뒤에는 오빠는 엄마와 자기는 뒷전이고 자기 부인만 사랑하는 것 같아서 자주 다투게 되었다. 더구나 조카가 태어난 뒤부터는 자기는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그 화풀이로 올케언니와 조카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오빠네 식구들은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집을 얻어서 피난(?)을 떠났고 엄마는 날이 갈수록 한숨이 늘고 계시다. 그 서러움이 회한이 되어 울음으로 터져버린 것이다.
다음날 방과 후에 여학생은 오빠의 집을 찾아갔다. 두 집 살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더 벌어야 하기 때문에 올케가 시장에 나가서 남의 집 장사를 돕고 있는 형편이라 집안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팔을 걷고 묵은 빨래부터 시작했다. 조카의 기저귀도, 언니와 오빠의 내복도 있는 대로 빨아서 줄에 널었다. 어깨도 아프고 팔도 아팠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밥을 짓고 냉장고를 뒤져서 반찬을 만들어 상을 차렸을 때쯤 올케 언니가 조카를 업고 집 안으로 들어서다 자기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쳐 놀랬다. 자기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언니를 반갑게 맞았다. 그제야 베란다에 널려 있는 빨래들과 저녁 차림이 올케의 눈에 들어왔는지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아가씨!”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끔 들려서 돈을 보내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기 일쑤이던 시누이가 오늘은 다른 모습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큰 변화를 목격한 것이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올케에게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고 그 어린이는 오빠가 어디 있는지를 찾고 있지만, 자기는 오빠가 가까이 있는데도 일부러 오빠를 마음 속에서 지워가고 있었다. 그것은 올케에게 오빠의 사랑을 뺐겼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오빠를 찾는 어린이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 아프게 하고 괴롭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올케는 오늘처럼 기쁜 날이 또 있겠느냐면서 어머님을 오시게 해서 잔치를 하자고까지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했더니 자기 자신이 보이고 다른 모든 것들도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고백에 가까운 경험담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전교생들 앞에서 발표되었고 이 여학생을 격려하는 박수가 전 학교에 울려 퍼지면서 ‘사랑의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퍼지는 교육효과도 얻게 되었다. 나는 이 여학생의 이야기가 생각날 때마다 입으로 중얼거리게 되는 젠의 노래가 있다.
“언제나 나는 물었다/ 언제나 주께 물었다/ 세상은 사랑 찾는데 왜 고통이 있냐고/ 오직 한마디 내게 주었네. 마치 물음에 답하듯이/ 사랑하라 알고 싶거든 빛이 솟음을 너 보리라/ 사랑하라 말해주네/ 사랑을 하면 알리라/ 사랑하라 슬픔 가고 기쁨을 찾으리.”
서울 장충여자중학교, 영등포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서울시교육연구원, 교육부 교육연구사, 한국시민자원봉사회 중앙위원장을 맡았다. 현재 서울시교육청 인사위원회 위원, 한국평협과 서울평협 회장에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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