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은 기본적으로 동독 주민이 요구한 것이다. 그 요구는 당시 구소련의 지도자인 고르바쵸프의 동유럽 국가에 대한 개혁·개방정책(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과 연결된 시민혁명을 통해 분출되었다. 그들 모두는 통일을 하면 자유롭고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 믿음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그것은 분단 아래 부단히 이루어진 양독간의 길고 긴밀한 교류협력을 통해 생겨났던 것이다.
교류협력을 통해 얻었던 서독과의 경험이 통일을 하면 서독과 같이 자유롭고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옛 동독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통일을 하려 했다. 그것도 동독이 서독 속으로 편입되는 형태의 통일을 원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의 평화통일, 동독주민들이 시민혁명으로 쟁취한 통일이 독일 통일의 실체다.
1970년대 초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가 국제적 긴장완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의 완화, 민족의 정체성 유지 및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 동독과의 관계개선과 교류·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것이 통일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독 측은 당초에는 서독과의 교류·협력이 체제부담 요인이 된다는 점을 감안,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서독과의 공식적인 관계발전이 국제법상 독립적인 주권국가로 승인을 받을 수 있고, 경제적 실리를 확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고려했다.
이런 동서독의 통일도 적지 않은 부작용을 불러 왔다. 서독은 통일을 먼저 돈으로 생각했다. 돈(경제적 통합)도 중요하지만 사람(정신적 통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또 통합의 과정을 서독이 전적으로 주도하면서 모든 주요 자리를 독차지했다.
또한 서독이 부담한 통일 비용의 50% 정도는 동독 주민들의 연금, 실업급여 등 사회보장기금으로 활용됐다. 서독이 통일로 인해 내수 진작 효과를 누린 건 고작 최초 1~2년 정도에 불과했고 10여 년 동안 장기적 경제침체를 겪어야 했다. 서독의 선진 사회보장 시스템이 동독에 그대로 이식되면서 복지비용과 실업이 크게 늘어나 동독 주민은 스스로를 ‘2등 국민’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동독 지역에 서독 수준의 복지 정책을 폈지만, 동독 주민이 서독 주민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더 커졌다.
동독주민의 마음을 사면서 이룩한 통일, 동독 주민이 스스로 원해서 이룬 통일, 그리고 주변국들이 동의한 통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 동서독은 주민들 간의 이질성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북한이 만약 동서독과 같이 서로 왕래하고 적응하는 과정 없이, 또한 상대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통일을 한다면, 더구나 남북갈등이나 남남갈등이 동서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우리에게 통일은 과연 축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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