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시절 6ㆍ25사변으로 인해 내가 살던 경주에도 미군부대가 주둔했고 주일에는 그곳 본당이 비좁을 정도로 많은 미군들이 미사참례하러 오곤했다.
미국인 군종신부도 한분 계셨는데 평일에도 우리 본당에 자주 오셔서 도와주시던 무척 자상한 분이었다. 그분에 관한 각가지 기억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번은 주일미사가 끝난 후에 이름난 개구장이 둘이가 성당마당에서 싸웠는데 그 중 한 아이는 코피가 터져 온 얼굴과 옷이 엉망이 되었고 때마침 밖으로 나온 모든 신자들이 시켜보는 가운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뛰어들어 자기 아이의 뺨을 때리며 야단을 쳤다.
이 광경을 보신 그 신부님이 급히 달려와서 말렸고 깨끗한 손수건으로 피묻은 얼굴을 닦아주며『예수님의 친구인 어린이를 매질하면 못써요』하며 그 아이의 아버지를 나무랐고 자신의 손과 옷에 묻은 피는 아랑곳 않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무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던 소년의 아버지와 옆에서 남의 일처럼 구경만하다 신부님의 표양을 보고 부끄러워하던 신자들의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 한번은 보미사 당번이 되어 제의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제의를 입고 계시던 신부님이 갑자기 성전밖에 세워둔 자신의 지프차로 달려 가셨고 이내 되돌아 오신 그분의 손에는 조그만 립스틱이 들려 있었다.
곧바로 신부님은 그것을 마루를 닦고 있던 수녀님께 건네주셨는데 알고보니 수녀님의 입술이 추위에 터서 갈라져 핏망울이 맺혀 있었고 그것을보신 신부님이 입술 튼데 바르는 약을 갖다 주신 것이었다.
수녀님이 너무나 고마워 하신건 말할 것도 없지만 옆에서 바라보던 어린내 가슴속에도 뭉클한 감동이 일어났다.
어디 그뿐인가. 성탄절에 맛있는 과자를 한아름 안고와서 어린이들에게 나누어주며 함께 노래부르며 놀던일、헐벗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내의와 양말을 손수 입혀주시던일、예산부족으로 불을 못피워 썰렁하던 본당 신부님의 접대실에 군용석유 난로를 들고와 몸소 불을 지펴주시던일、그리고 미군들이 봉헌한 주일헌금을 모두 본당에 회사하시던 일 등등 그분의 사랑 나눔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것 같다.
또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미사때마다 포도주를 잔에 듬뿍 따르도록 하셨는데 미사중에 어찌나 맛있게 드시느지 우리 복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지 않을수 없었다.
미사용 포도주 역시 그분이 직접 가져오셨는데 이런 우리들의 심정을 짐작하셨는지 하루는 미사가 끝난후 큰컵에 한잔씩 주셨고 이를 맛있게 먹은 우리는 어지러워 혼난적도 있었다.
이와같은 추억들은 일상생활에 흔히 체험할수 있는 평범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을 결심할때마다 항상 그분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 어떤 훌륭한 강론보다 더 큰 감명을 느끼게 되는건 어린 마음에 심어진 싱싱한 감동과 인정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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