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해지던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작업실에서 잠시 일손을 놓고 어둡고 먼 하늘을 바라 본다. 단 한치의 여유도 없이 가득히 창을 메우고 내리는 진눈깨비가 장터같이 어수선한 나의 내면 (內面)에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간밤에 읽은「택시 운전사 박종만씨의 분신자살」에 얽힌얘기가 생각난다. 그가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건넨『미안하다. 미안하다』라고 한 그 목소리가 눈보라 속에 흩어지고 있다.
유리창에 비친 내얼굴, 찌들고 왜소해진 낯선 얼굴이 눈보라를 맞고있다.
내 나이 서른아홉, 중연의사제. 『나는 그 동안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어떻게 살아왔나』하고 생각하니 문득 시린가슴에 미동하던 羞恥心이 나를 어지럽힌다.
분명 처음 시작할 땐 이런게 아니었는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아집을 허물고, 무너진 집터위에 다시 집을 지어주소서』나직히 한숨같은 기도로 눈을 감는다.
며칠전에 찾아왔던 청년S. 그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을까 데모주동자로 한때 낙인이 찍혀 이사회로부터 소외당한 S. 흙삽을 손에 쥐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또 다른 일을 시작하겠다는 그의 밝은 모습이 눈에선하다. 그리고 내 주위의 수많은 젊은이들, 오늘은 왜 그들 모습 하나하나가 나에게 이토록 선명하게 부각되어 나타나는 것일까?
제한된 공간에서 좁은 철창을 향해 꿈과 희망을 한송이 꽃으로 피우기 위해 긴긴 시간을 참고견디는 囚人과 같은 내 주위의 수 많은 젊은이들. 그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그랬겠지만 특히 오늘 우리시대 이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참으로 무서운 열병을 앓고 있는게 아닐까. 돈과 권력과 명예에 눈이 어두운 기성세대들은 각가지 방법으로 物神崇拜와 拜金主義를 조장해 놓고 온갖 억압구조를 동원하여 채찍을 휘두르며 좁은 골방으로 몰아넣고 있는게 아닌가.
풍선을 쥐고있는 아이에게『좀더 크게 좀더 크게 불라』고 충동질 해 놓고 풍선이 터지자 아이를 나무라는 부모들, 바른 말과 올바른 사고로 기존체제에 의문과 반기를 드는 청년들에게「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놓고 철저한 감시망을 펼쳐놓고 있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그리고 문제 청소년「선도」를 위해서「경로사상강화」이른바 어른 섬기기 작전쯤으로 해결하려는 전근대적 권력주조의 희귀한 발상, 그리고 젊은이들의 발언을 철없는 아이들의 잠꼬대나 코고는 소리정도로 흘려버리는 독선적인 종교 지도자들…. 이 거대한 악의 구조아래 나병 같은 타성에 나는 또 얼마나 병들어 있는 것일까.
지난해 12월 1일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른 박종만씨. 그대는 나의 죄와 이 시대의 현명한(?)모든 기성세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이 되고자 1985년 청소년의 해를 맞이한 꿈많은 이 나라의 모든 청년들에게 희망을 선물로 남기고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가? …초라한 그대 무덤에도 지금쯤 저 희디흰 눈이 소복히 소복히 쌓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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