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장의 熱氣는 왜?
나도 또한 유세장에 갔었다. 지난 총선때의 일이다.
「나도 또한」이라는 표현이 필자 스스로에게도 일깨움을 준다. 누군가의「군중속의 고독」과는 딴판으로 그때 군중속에 끼인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었다. 군중들 사이에「익명」의 군중의 일원으로 섞일수 있음은 남다른 즐거움이기도 하였다. 정치적 생각은 설혹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여도 그때 질퍽거리는 운동장에서 신발과 바지가랭이를 온통 흙범벅하고 섰던 군중들은 모두 한줄의「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끈」이란 이를 테면 민중의 진흙탕처럼 순수한 연대(連帶)인 것이다. 그들은 박수치고 웃고 야유하였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무엇인가를 연호(連呼)하였다. 그것도 합창으로.
유세장은 열기로 가득찼다. 과연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무엇이 이들을 열광하게 하는가. 무엇이 이들을 유세장으로 이끌어들이는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그점이 궁금하였던 것이지만 궁금증을 풀기에 앞서「나 또한 」열광에 동참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즐거움이자 부끄러움이기도 하였다.
◆「듣도 보도 못하던 」이야기
군중의 입장에서 듣자면、그 이야기들은 「듣도 보도 못하던」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그때까지 막연하게 의혹의 언저리에 맴돌던 일들이 진실의 실체로 드러나기도 하였고 또 어떤 것은 여전히「설마、과장이겠지」싶은、믿을수 없는 일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진상」보다도 속 후련한 대목은 주저함이나 양보가 없는 비판이었다. 비밀은 바로 비판에 있었다.
군중은、그것이 조금은 지나치고 과장은 되었다 하더라도「비판다운 비판」에 너무 굶주려왔던 것이고 깨어져나가는 이 사회의 금기(禁忌)들을 목격하면서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오늘의 언론、할말 다하는가
사사로운 느낌으로는、특히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이 입장에서는 참담하다고 할 비판도 많았다. 도대체 국민들에게 일찌기「듣도 보도 못하던」일들이 이토록 많을수 있음은 그 원인과 책임이 전적으로 언론에 있는것이다. 언론이 말하지 않고 전하지 않는 메시지가 유세장이라는 광장에는 있기 때문에 군중들은 그토록 몰려들고 열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까닭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까닭의 일부임에는 틀림이 없다.
적어도 필부진언(匹夫盡言)이 옛왕조시대 선비들의 으뜸가는 덕목이었던데 비해 오늘의 언론은 과연 할 말을 다하는가를 자괴(自愧)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벌받는 것일세』농담도
나는 또 그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지난 겨울 나를 괴롭힌 별난병(病)에 관한 것이다. 어느 아침 갑자기 나는 나의 오른 쪽 얼굴근육이 움직이지 않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양치질을 하면 물이 새고 한쪽 눈이 감기지 않아 세수를 할때면 비눗물이 따갑고、차츰 발음(發音)까지 서툴러졌다. 말을 하거나 특히 웃음이라도 터뜨릴라치면 얼굴은 홱 왼쪽으로 일그러졌다.
의사는 안면신경 마비라고 하였다. 한의사에 의하면 이 병의이름은 구안와사였다. 눈과 이 한쪽으로 비뚤어진다는 뜻이다.
흔히 얼굴 한 쪽을 차게 압박하는 경우、예를 들면 한여름 마루에서 다듬잇돌을 베고 낮잠을 자고났을 때에 잘 걸리는 마비증세라고 하였다.
나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원인이 없었다. 있다면 약간의 과로、또는 과음일 것이었는데 전문의의 설명으로는 현대 의학도 아직까지 이 증세의 원인을 밝혀내지는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원인불명」이라는 대목에서 자위(自慰)의 실오라기를 잡았다. 그렇다. 성한 입을 주어도 말을 다 못하는「언론인」이라면、그에 대한 일벌백계적인 책벌(責罰)로 성한 입을 아예 비뚤어뜨려 놓으리라、라고 누군가가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우리 속담엔「입은 비뚤어도 말은 바로 하렸다」라는 교훈이 있거늘….
이렇게 쉽게 생각하니 속은 편해졌다. 처음엔 초조하고 불안하였으나『이것이 벌받는 것일세』하고 친구들에게 농담하는 사이에 두달 가까운 치료기간이 지나갔고 원상회복이 되었다. 나는 바로 그「입 비뚤어졌던 기억」을 유세장에서 떠올렸던 것이다.
내입은 물리적으로는 원상회복이 되었으나 입가 관련된 모든 것이 그처럼 회복되었던 것은 아닌 것이다.
◆公論은 나라의 원기
일찌기 조선조초기의 신숙주(申淑舟)는 이런 말을 했었다.
『천하에 언로가 있음이 사람 몸에 혈기가 있는것과 같으니 혈기가 한참만 돌지 않으면 온 몸에 병이 생긴다…』
그 훨씬 뒤의 이율곡(李栗谷)도『공론(公論)은 나라의 원기』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나 민간에 있으면 나라가 어지럽다. 만일 조정에도 민간에도 공론이 없게되면 나라가 망한다…』
◆어느때나 백성을 두려워해야
나의 병도 나라의 병도、이쯤에서 자명한 것으로 해명이 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유세장의 폭발적 함성을 설명하기에는 훨씬 더 큰 부족감을 느낀다. 과연 그 며칠뒤 선거에서「백성이 뜻」은 그 힘의 일단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것을「충격」이라고도「돌풍」이라고도 불렀지만、분명한 사실은 백성의 뜻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이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엎기도 하는것 처럼、백성은 군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복멸(覆滅)하기도 한다…』
조남명(曺南冥)의「외민론(畏民論)」일절은 유세장에서 무수하게 난무하던 그 어떤「듣도 보도 못하던 이야기」보다도 무서운 진리이다.
백성은 어느때나 어디서나 두려워 해야하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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