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립니다.
지난번에 내린 잔설도 아직 마당 가득한데 지난밤에 또 눈이 내렸습니다. 덧눈을 쓸려고 대비자루를 찾아 집으로 오르내리는 진입로로 서둘러 나섭니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리면 한동안 차는커녕 사람도 오갈 수 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진입로에는 이리저리 온갖 발자국들로 어지럽습니다. 차가운 새벽부터 생존의 경연을 펼쳤던 모양입니다.
눈을 다 쓸고 난 후 거실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에 모든 감정들이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하얗게 깊어가는 겨울 풍경에 이왕 눈이 올 거면 일주일 내내 내려서 ‘동안거’라도 한번 할 수 있을까 라며 오기 아닌 오기도 부려보고 싶습니다.
창가에 멧새가 포릇포릇 날아와 이리저리 쏘아 다니고 그제서 한줌의 싸라기를 눈 없는 축담가에 뿌려주며 현실로 돌아옵니다.
농부에게는 요즘이 안식의 계절이며 치유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 아니 기약 없이 미루어도 되고, 오늘 해야 하는 일보다도 옆집에서 부르는 술친구가 먼저입니다. 긴 겨울이 무료해질 때면 그들은 한겨울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는 열정에, 민가까지 내려오는 멧돼지를 따라 산을 헤집고 다니기도 합니다. 하루의 파티가 끝날 때쯤이면 누군가가 나서서 내일의 또 다른 음모를 이야기합니다. 고향에 발을 딛고 사는 저들에게는 할 수 있는 일들과 특권이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아무리 놀아도 끝을 알 수 없는 내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에 비해 도시에서 귀농한 이들은 그들만큼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10년이 지났어도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 있는 간격처럼 그들에게는 다가설 수 없는 포스가 느껴집니다. 시쳇말로, 그들 앞에서는 겨우 양동이나 들고 다녀야 하는 반거치가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반짝이는 휠 낚싯대나 두툼한 지갑이 없어도 즉석에서 이벤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문가들 같습니다.
이 겨울이 다할 때쯤이면 하얀 냉이꽃과 노란 꽃다지가 포도원을 지천으로 덮고, 포도나무의 발가스런 어린 새잎이 터지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향연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 향연은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기도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자연은 이렇게 매년 치유되지 않던 가슴의 바람구멍을 에둘러 치유하고 그 위대함으로서 겸손을 가르칩니다.
농촌으로 내려온 후 집으로 방문한 친구의 말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서 너처럼 출세하지 못한 친구는 처음 본다고 하는 한 친구의 말이나 겨우 농촌에 정착하였다고 성공한 귀농인이란 명칭을 서슴없이 붙여주는 친구의 말에도 어색하기는 매 일반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저는 ‘속 편한 농사꾼’이 되어 보고 싶습니다. 요즈음은 무엇이 출세고 무엇이 성공인지 그동안 심어졌던 기준들이 모든 가치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내년 봄에는 전례 없는 대가뭄이 올 것이란 뉴스에도 무덤덤하게 감사할 수 있는 진정한 농사꾼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내가 걸어온 이 길을 또 다시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는 귀농인이 아닌 원주민으로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많은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정녕 평화의 씨앗이 뿌려지리라. 포도나무는 열매를 내주고 땅은 소출을 내주며 하늘은 이슬을 내주리라. 나는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이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리라.”(즈카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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