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들은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느라 3개월 정도를 지내고 수료식을 통해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설렘으로 기다렸던 기대와는 달리 첫날밤부터 지내기가 녹록지가 않다. 다행히 가족이 먼저 와서 환영할 사람들이 있는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연고가 없이 혈혈단신으로 온 이들은 사정이 다르다. 아무도 없는 집에 아무것도 걸린 것 없는 사방이 휘휘한 벽과 보일러도 켜지지 않은 썰렁한 방바닥에 덩그렇게 혼자 던져졌다는 느낌에 외로움이 엄습한다.
내가 정말 잘 온 것인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부터 가족에 대한 그리움, 오랫동안 살아 왔던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나온 것에 대한 두려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막막함이 하룻밤을 눈물 없이 지내기 어렵게 만든다. 다음날이 되면 지역에 있는 하나센터에서 남한사회에 익숙해지기 위한 교육과 지원을 받기 시작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한 자격증이나 학업을 알아보는 등 정착에 필요한 삶의 힘찬 발걸음을 바쁘게 내딛기 시작하는 시간들이 쌓여가면서부터 점차 마음의 여유가 찾아온다.
이렇게 낯설고 힘겨운 정착생활, 즉 대한민국에서 한 살의 나이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들을 만나면서 남한 적응기를 듣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버스에 오르면서는 교통카드를 찍었는데 내릴 때는 모르고 안 찍었다가 주위에서 카드를 안 찍을 경우 많은 돈이 나간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그 버스를 쫓아가 다시 찍은 일, 취직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한참 후에 합격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해보니까 ‘기다리세요. 연락드릴게요’란 말을 듣고 그 말이 불합격이란 뜻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마냥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씁쓸한 일, 식당에 취직해서 처음 일을 할 때 손님들이 ‘처음처럼’이라는 소주를 주문했는데 상을 다시 차리라는 말로 알아듣고 다시 차렸다가 주인이나 손님들 모두를 당황하게 한 일,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담당형사와 음식을 먹으러 가서 무엇을 시켜야 될 줄 몰라 망설이다가 담당형사가 시키는 것을 보고 따라해야겠다는 생각에 형사가 “메뉴판 좀 주실래요?”라고 하기에 따라서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했다는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등과 같은 강렬한 의미의 선전문구나 구호에 익숙한 그들에게 재치있게 쓰인 환경 캠페인 문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플래카드, 순대집의 ‘순대렐라’, 국수집의 ‘면(麵)사무소’, 삽겹살 집의 ‘돈내고 돈(豚)먹기’, ‘불티나’ 등으로 쓰인 상점 간판들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고 재미있어 한다.
그들의 눈과 마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이상하고, 다른 것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눈과 마음이 되기 위해 자주 만나고 듣고 나누고 이해하는 시간들을 쌓아가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