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차 찾은 서울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풍경은 낭만과 그늘이 교차한 삶의 현장이었다. 재개발 사업을 두고 백사마을은 방향을 잃고 부유하고 있었다. 마을 곳곳엔 주민대표회의에서 붙인 호소문, 한국토지주택공사(LH) 공문, 과거 주민대표회의를 규탄하는 벽보 등 갈등의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마을 가옥 대부분은 속이 빈 블록벽돌로 지어져 있었고, 주민들은 빗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슬레이트 지붕 위에 비닐과 폐타이어를 얹었다. 곳곳에 책장, 싱크대, 문짝 등 살림살이가 어지럽게 버려져 괴기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그곳에 사는 어르신들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직접 만나본 어르신들 가운데 대부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재개발의 이권다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 할머니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이제 와서 무슨 재개발이야. 난 재개발에 관심 없어. 어서 하느님께서 (나를)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네.”
인간은 한평생 돈·명예·권력 등을 좇는 가운데 실제로 그것들을 움켜쥐며 만족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과 관계 맺는 인간은 이와 정반대의 체험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가까이 갈수록 비참하고 어두운 현실을, 다른 말로 ‘가난’을 체험한다. 교회가 사순시기 전례에서 신자들을 광야에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의 가난은 한편으로 양가성을 지닌다. 풍요와 가난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따라서 물리적 의미에서의 가난이나 기아를 ‘퇴치’하는 일은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풍요’는 아니다.
백사마을 어르신들은 가난했고, 누구보다도 풍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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