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랫만에 대구를 찾았다. 1ㆍ4후퇴가 있던 해인 1951년 이곳으로 피난을 와 열한살 소년시절을 보낸 후 몇번 스쳐는 갔지만 정작 이번처럼 하루를 묵으며 여유있게 옛추억을 더듬기는 처음이었다.
◆영혼의 안식처였던 聖堂
교우인 제자와 함께 계산동성당도 찾았고 성모당에도 올랐다. 퇴색한 기억속에는 계산동성당 앞마당이 꽤나 넓었던 듯 싶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좁았고 바로 성당 뒤에 불어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성모당은 훨씬 떨어진 주교관 내에 있었다. 그러나 옛풍이 담긴 성당의 붉은 벽돌이나, 쌍을 지어 우뚝 솟은 뾰죽 십자가는 기억 그대로 정겨웠고 그윽하게 가라앉은 성모당의 경건한 분위기도 그때나 다름없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바로 이 두곳이 전쟁에 찢긴 어린소년의 영혼을 달래주던 안식처였거니 생각하니 벅찬 감회를 누르기가 어려웠다.
1ㆍ4후퇴가 있던해 겨울의 추위는 대단했다. 살을 에이는 추위속에서 열엿새를 걸어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심신의 피로가 극에 달했고、외가인 평택을 떠날때 뒤를 쫓던 포화소리가 그대로 귓전에 남아 있었다. 대구에 정착한 이후에도 어려운 피난생활이라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엄두도 못냈다. 신문도 팔아보았고、어머니 바느질감을 받으러 종로 뒷골목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마땅히 고달파야했을 이 시절이 그때나 이제나 꽤나 행복했던 시절로 뇌리에 각인되는 것은 무엇보다 계산동성당과 성모당이 나에게 선사해준 사랑의 묘약때문이 아닌가 한다.
◆꿈속에 아로새겨지는 神父
그때 열한살짜리 소년은 성당다니는 기분으로 살았고 또 스스로 성소를 받았다고 느꼈다. 서울에서 엄마따라 건성으로 성당문턱을 드나들던 나를 이처럼 바꿔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당시 계산동본당 보좌신부님으로 계시던 젊은 신부님이었다. 부끄럽게도 이제 성함도 기억못하는 이 신부님의 따뜻한 손길이 나의 대구 피난시절을 더없이 아름답게 수놓아준 것이다.
그 신부님을 기억에 올리면 항상 다가오는 감격스런 장면이있다.
언젠가 보좌신부님이 교리반 어린이들을 모아, 성당에서 봉사해야할 역할에 따라 이들을 몇몇그룹으로 나누셨다. 신부님께서는 우선 각자가 원하는 대로 지망을 하게 하고 경합이 많이 되는 그룹은 다시 조정을 한다는 원칙을 미리 밝히셨다.
누구나 예상했던대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복사반을 지망했다. 그때 나이의 소년들에게 붉고 예쁜 복사복을입고 제대앞에서 신부님을 돕는다는 일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음은 쉽게 이해가 될 일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까이서 독점하는 느낌이었을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나는 복사반 지망을 처음부터 생각치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분명치 않으나 모두가 그쪽을 원하니 경합하기를 꺼려했던듯도 싶고, 또 원래 허둥대는 편인 내가 제대 앞에서 실수나 하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보좌신부님의 의아한 눈초리가 나에게 향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신부님께서「주일날 가톨릭신문 팔 사람」하고 외치셨다. 나는 호기있게 손을 번쩍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30명 가까운 어린이들 중에 유독 나 혼자만이 손을 치켜든것을 알고 얼굴이 붉게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때 보좌신부님이 급히 나에게 다가오시면서『분도 그건 안돼!』하고 노한 목소리로 외치셨다. 이윽고 놀라서 올려보는 나를 부둥켜 안으시며『내가 너 고생하는 것을 잘 아는데 성당에 와서도 신문을 팔다니、그건 정말 안돼』하시며 팔에 힘을 주셨다. 바로 그순간 나는 신부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엉겹결에 고개를 떨구면서 중얼거렸다.
『신부님、전 자신있어요. 신문도 팔아봤구요. 정말 제가 원하는 일인데요』
신물팔겠다고 나섰더니 결국 신부님은 내 고집에 꺽이셔서 가톨릭신문을 팔도록 허락해주셨다. 그러면서 신부님께서는 복사 옷 입은 내 모습이 보고싶어졌다는 얘기와、하느님께서 늘 신문파는 소년을 더 사랑하실 것이다라는 말씀도 들려주셨다. 지금도 왜 내가 그토록 신문팔 것을 주장했는지 분명치않다. 혹 어린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보좌신부님의 심리적 반향을 미리 간파하고 의식적으로 일을 그렇게 꾸몄는지도 알 수없다. 그랬다면 교활한 소년의 페이스에 순진한 신부님께서 말려들어간 셈이된다. 여하튼 나는 주일날이면 미사전후해서 열심히 신문을 팔았고 엄마친구들에게 매달려 짓궂게 신문을 강매하는 재미도 만끽했다.
보좌신부님과의 그 감동적인 순간의 기억은 시간과 더불어 계속 미화되어 내 가슴에 당겨졌다. 따라서 그때 그 기억이 당시의 실제와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지는 이제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 젊고 인자하신 보좌신부님의 눈에서 반짝였던 눈물은 나에게 아직도 더 할 수 없이 순연한 감동을 자아내고 아울러 하느님사랑의 유현(幽玄)한 깊이를 되새기게 한다. 열렬한 소년의 고달픈 대구 피난시절의 온갖 체험은 바로 그 순간 속에서 밝고 행복하게 승화돼 버린 것이다.
◆교회의 참된 生命力
나는 그후 언제부터인가 그 보좌신부님이 대구대교구의 S신부님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가톨릭신문에서 그분의 글을 여러번 읽고 처음에는 그럴수도 있다는 느낌이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그분이거니 생각하게 되었다. 뚜렷한 물론 논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전에 신문에 나온 S신부님의 모습이 내 기억속에 그분처럼 인자하고 잘 생기셨다는 것과 글이 좋았다는 것 이외에는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다. 물론 그때 보좌신부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직접 알아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 있어 그 기억은 매우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것이어서 누구에게 대놓고 털어놓은 일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 대구에 가서 만난 영남대의 C형에게 그냥 S신부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성인같은 신부님이시지」그분 대답은 간단했다. 서울에 올라와 어머님께 처음으로 그때 대구 보좌신부님 성함이 혹 S신부님이 아니셨던가 여쭤보았다. 어머님 말씀은 기억이 분명치 않다는 대답이셨다. 그후 나는 두분이 같은 분이 아니라도 별로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적어도 하느님의 참된 목자가 한분 더 계신다는 얘기일수 있으니 말이다.
흔히『신부님이나 성당보고 교회가나、하느님보고 교회가지』라는얘기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기억속의 보좌신부님」같은분의 뜨거운성화(聖化)의 힘이 역시 제3세기로 진입하는 한국교회의 참된 생명력이 아닐지.
안병영 <베네딕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오흐트리아 「빈」대학에서 정치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외국어대 교수
◇現 연세대 사회과학대학교수
지금까지 방주의 창을 집필해주신 정호경신부 정달영부국장 서영석학장 심상태신부님께감사드립니다.
이번호부터는 안병영교수ㆍ김진소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김정희교수(전남대) 오경환신부(가톨릭대교수) 순으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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