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 모세법은 죄를 진 여자를 돌로 쳐 죽였다. 자기들만 법을 잘 지키고 자기들만 도덕적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바로 그 당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다. 그들은 예수를 고발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음하다 들킨 여자를 만인앞에 끌어내고 교활한 방법으로 예수의 생각을 진단하였다. 예수는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들고『너희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하시며 고개를 숙이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보고『나도 너를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셨다.(요한복음 8장 7절 참조)
오늘 우리주변을 살펴볼때、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돌을 던지면서도 아무렇지 않은것 처럼 살고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 생각대로 다른 이를 함부로 판단하고 있는지 않는가 잠시 생각 할 필요가 있다.
◆사회는 윤리로부터 出發해야
그리고 오늘의 우리 사회구조나 교회의 구조를 분석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많은 회의와 좌절을 안겨 준다. 물론 인간사회이기에 회의와 좌절이 있을수 밖에 없다. 그러나 회의와 좌절을 통해서 나타난 모든 잘못과 오류가 바로「너」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명과 원망은 우리 사회의 고질화된 풍토병이다.
이러한 풍토병이 이제는 당위성마저 띠고 오히려 명령이나 강요로 둔갑하고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물론 이유도 있을 것이다. 명령과 강요、그리고 타협에 의한 사회구조안에서는 어떠한 선택도 있을수 없기에「너」때문이라는 말밖에 나올수 없는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사회란 타협이나 강요나 명령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할때 우리는『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수 없다. 人間은 자기 주변상황과 관련해서 늘 물음을 던질수 잇는 자유를 갖는다. 人間은 그 자유때문에 선택과 결정을 할수 있을것이며、그리고 그 선택과 결정에 따른 자기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탓할수 있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타에 의해서만 살아온 우리들! 이제와서 누가 누구를 탓할 수있겠는가? 이제라도 우리는 주인의식을 갖고 책임감있는 人間、책임감있는 공동체 형성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할 것이다.
최초의 人間 아담은 에와를、에와는 뱀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이와같이 원망과 저주가 바로 자기변명으로 강요된 것이다. 누구나 자기변명은 남을 원망하는 길이다.
이것이 태초의 인간조건이며 인간상황이다. 이러한 상황과 조건이 더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믿기에 교회는「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탓이로소이다」하면서 祭儀를 통해 원초적인 인간생활을 고백하는 것이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동안 죄의 근원이「너」의 탓이 아니라「내」탓이요、「너」때문이 아니라「나」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은 성스럽고 거룩하고 높고 그윽한 것과 만남의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에서 우리들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되며、그리고 보속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왕국을 발견하게 된다.
오로지「너」때문이야、오로지「너」의 탓이야 하는 원망과 저주가 가득한 그곳에는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자기가 고백하고 있는 종교와 관련해서 늘 새롭게 자기 신앙에 대하여 물어야 할 것이다.
◆回心없이는「너」와 일치못해
하느님을 지각하는 자、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엎드려 우리 모두 죄인임을 고백할때 독선자와 위선자의 탈을 벗게 될 것이며 그래야만 참된 人間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 죄인은 차라리 겸손하다. 『너희중에 죄없는 자 먼저 저여자를 돌로 쳐라』뼈저린 말이다.
먼지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없다는 우리네 속담에서 아무도 다른사람을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판단할 수없음을 안다. 위선과 독선에 대한 채찍이다. 人間은 혼자서 삶을 창조할 수 없다. 人間은 너를 향한 존재로서 너를 필요로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너를 부정하고、때로는 너를 원망하며、때로는 너를 실망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과 갈등 속에서 人間은 끊임없이「너」를 원망하고「너」를 그리워하며「너」와 더불어 사건의 쟁점과 부딪치면서 실현해 간다. 믿음과 의혹、 확신과 불신、변명과 원망、사랑과 증오! 이러한 모든 역의 쌍은 서로가 서로를 수용하면서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강요하면서 곡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신을 부정한 현대사상과 현대문명이 비록 언어의 혼란을 가져오고 또 자기주장과 자기고집이 대화를 단절시킨다 할지라도 하느님 왕국을 위한 우리의 기도와 청원은 포기할수 없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정신이 우리를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우리의 현장이 부정적이라도 우리에게 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청원해야 한다. 아무도 회심없이는 너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정희<빅또리아>
◇조선대생물학과졸업
◇독일 레겐스브록大신학과, 박사학위취득
◇독일아우스브룩大교환교수
◇現 전남대사대 국민윤리교육과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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