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속에서「만약…이 없었다면, 어찌 했을까」식의 가정을 해보라치면, 나는「훈민정음의 창제와 3ㆍ1운동 그리고 4ㆍ19혁명」은 없었다면 큰일날 일로 들고 싶다. 모진 풍상으로 점철되는 5천년 역사동안 세계사의 객체로서 주변적 삶만 이어온 우리에게, 「主體的 精神史의 맥락에서 뜻있는 세계인의 의식을 뒤흔들었던 일이 있었다면 위의 세가지 민족사의 기념비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글이 없었다면…
특히 외국에서 얼마간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우리 민족이 한글이라는 보배를 갖고있는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를 절감한다. 한글이 자랑하는 과학성이나, 한글창제에 담겨진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정신은 차치하고라도 우리글을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체적 문화민족으로서의 우리의 긍지를 크게 선양해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직도 한문이나 쓰고있다면 비록 정치적으로는 독립국이더라도 우리가 정작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대우를 받을수 있을까. 역사의 천덕꿍이를 내려다보는 서양인들의 卑下의 눈초리가 얼마나 따가왔을까.
◆3ㆍ1운동은 민족운동의 큰峰
일제치하 35년간의 암울한 세월속에서 우리민족은 국내외를 통해 줄기찬 항쟁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민족자결의 높은 뜻을 가장 당당하게, 문화민족답게, 또 만백성이 한 목소리로 온누리를 향해 천명한 것이 바로 3ㆍ1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의 큰 봉우리였다.
드높은 민족정기와 그윽한 문화의식이 민족정기와 그윽한 문화의식이 더없이 아름답게 조화된 역사의 걸작품이었다. 그러나 3ㆍ1운동과 연관지어볼 때 천주교회는 얼마간의 自愧와 悔恨의 정을 감추기 어렵다.
널리 알려져있듯이 개신교와 천도교처럼 조직적인 참여를 하지못했고, 그 이후에도 개인구령에 전념했을뿐 민족적결단의 명제에 관하여는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그러하기에『安重根義士가 천주교인』이라는 정도로 자위하거나 호도하기에는 미흡한 바가 크다.
◆교회는4ㆍ19참가로 보속
4ㆍ19혁명은 비록 교과서를 통해서나마 자유와 민주주의의 참가치를 학습했던 해방 이후 첫 한글세대가 창출한 현대사의 가장 찬연한 금자탑이다. 질풍 같은 역사의 분류(奔流)앞에 백년묵은 이무기처럼 위세가 당당했던 이승만독재정권이 하루 아침에 붕괴됐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보다는「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기다리는 편이 났다고 빈정대던 외국언론들이 입을 모아 멋진 민주승리에 찬탄을 금치 못했던 자랑스런 역사의 章이었다. 그때의 주역들은 이미 중년을 넘어 희끗희끗 머리칼이 변하고있으나 당시의 순수한 감동은 아직도 이들을 전율시키기에 속한다.
4ㆍ19정신은 이후 민주화를 지향하는 모든 정치 사회운동의 공통분모로서, 또 퇴색되지 않는 불멸의 신화로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영원한 수호신의 구실을 맡고있다. 아직도 남북대결과 체제경쟁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4ㆍ19혁명이 없었다면 무엇을 앞세워 우리가 추구하는 규범적 목표를 정당화 시킬수 있었을까.
이승만 정권 말기에 정치적으로 얼마간의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던 천주교회와 천주교인들은 4ㆍ19혁명전열속에서 반독재투쟁의 주요한 일익으로 용기있게 싸웠다. 개신교의 일부가 구정권의 일각을 지탱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었다.
우리가 교회는 이로써 어찌보면 3ㆍ1운동때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정신적 보속의 치룬셈이다.
위의 세가지 기념비적 사건들은 한결같이 우리민족의 자의식을 선양하고 세계사의ㆍ도도한 흐름속에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이정표를 제시한 역사속의 큰 발자국들이다.
◆『껍데기는 가라』외칠 詩人
위의 세가지 중 글쓴이가 직접 체험할수 있었던 것은 4ㆍ19였다.
대학 2학년때의 그 감격적인 순간순간들이 이미 4반세기를 지난 오늘날까지 더없이 순수한 감동으로 되살아 올때면, 이 未完의 혁명이 끝내 이 땅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우뢰와 같은 함성을 함께 듣는다.
데모대열속에서 구호를 외치며 애국가를 부르며 나는 계속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기가 힘겨웠다.
한글세대가 이만큼 커서 이제 껍데기 민주주의가 아닌, 진짜 민주주의를 쟁취하겠다고 절규한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감격에 겨워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때의 그처럼 무후(無垢)한 감동을 이후로는 경험하지 못했다. 스무살의 젊음을 강타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 그처럼 강렬했던가, 지금도 옛전설을 더듬듯 당시를 회상한다.
4반세기가 지난 오늘, 4ㆍ19는 日常속에서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또 스쳐갔다. 정치인들이 적당한 시차를 두고 4ㆍ19묘역을 찾아 헌화를 했고 또 언론이 상투적인 어귀로 4ㆍ19의 높은 뜻을 기렸다. 대학주변에서는 4반세기전의 그때처럼 매캐한 최루탄냄새가 오가는 이들을 괴롭히고, 이미 이 사회의 주인이된 당시의 혁명주역들은 월속에서 한껏 오염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돌아보며 잠심 씁쓸한 웃음을 날린다. 이모습을 만약 죽은 시인 申東睡이 보았다면 『껍데기는 가라』고 다시 외쳤을 서싶다.
4ㆍ19는 빛바랜 신화로 끝나서는 안된다. 한글이 우리에게 문화민족의 긍지를 선사하고, 3ㆍ1운동이 자주와 독립의 의지를 고취시키듯 4ㆍ19는민주화를 갈구하는우리세대의 가장 생명력있는 외침으로 우리의 의식과 생활속에서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야할 것이다.
우리의 지치고 때묻은 모습이 그 뜨거운 젊음과 순수한 감동으로 새롭게 태어날 때 이 사회를 억합하고 멍들게하는 온갖 껍데기는 하나씩 자취를 감출것이 아닌가.
◆서러운 우리聖人이름택한 뜻
우리나라의 2백년 천주교회사에서「없어서는 안될…」가정을 해보라면 나는 단연 우리 先人들의 순교라고 대답하고 싶다. 살아 숨쉬는 사람들 모두가 마지막까지 아끼는 목숨을 초개처럼 바쳐 하느님을 증거한 그들의 붉은 넋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정신사가 얼마나 초라했을까. 103위순교자들의 시성이 우리에게 심어준 감격과 자부심 그리고 토착화된 우리의 교회를 키울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의 뿌리는 바로 이들의 숭고한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새로 입교하는 우리 농어촌의 새신도들이 成人들의 생애에 공감하여 자신의 영세명으로「간난이」「언연이」등「우리聖人」의 서러운 이름을 즐겨 택한다는 소식을 들으며, 우리 교회와 신도들을 聖化시바로 선인들의 순교정신이라는 생각을 되새겨 본다.
안병영
<베네딕또>
<연세대 사회과학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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