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영어로 된 간판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탈북자들이 종종 있다. 대부분이 영어로 된 간판이고, 진열된 상품도 전부 영어 투성이다. 한글이 존재하지만 꼬부랑글자로 모든 걸 표시하다 보니 옷 한 벌 사기도 까다롭고 치수마저 죄다 영어다.
북한 길거리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영어로 된 간판이 없다. 옷을 파는 곳은 백화점 혹은 공업품 상점으로 표시하고, 간장이나 된장을 판매하는 곳은 식료품 상점이라 불린다. 그래서 남한 초기 정착 탈북자들은 영어로 된 간판 때문에 어디서 무엇을 파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한국사람들의 말 속에는 습관처럼 외래어가 섞여 있다. 한 문장을 말하는데도 꼭 영어가 한마디씩 들어간다. 옆에서 듣기론 멋있어 보이지만 무슨 말인지 뜻을 알 수 없다. 신문도 외래어 천지다. 한글로 된 문장을 신나게 보다가 영어만 나오면 손맥이 풀린다.
한 번은 아울렛에서 예쁜 원피스를 사려고 값을 물었더니 판매원이 하는 말이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동안 머뭇거리는데 판매원은 같은 원피스를 택한 다른 고객에게도 사이즈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고객은 “ ‘S’요” 라고 대답했다. 순간 나는 원피스를 남한에선 ‘S’라고 부른다고 착각했다. 값을 계산한 후 나는 판매원에게 인사말로 “ ‘S’가 예쁘네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맹랑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나도 북한 정권이 싫어서 탈북했지만, 북한 내에서 이뤄지는 언어순화는 굉장한 장점인 것 같다. 언젠가 남한 친구가 탈북자끼리의 대화를 듣더니 “북한 말은 듣기가 편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외래어의 남발이 교양의 척도인 양 생각하는 남한사회에 살다 보니 오히려 북한말이 예뻐 보인다는 것이다. 외래어 때문에 남한 적응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모르는 영어 단어 천지다. 확실히 언어는 통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영어를 모르고는 일상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걸음마다 느낀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과의 소통이 차단된 북한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왔다. 자기 것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 영어는 꼭 필요한 언어다.
남한 정착 3년 차가 돼가는 지금도 영어로 된 간판이나 설명서를 보면 지인의 도움을 받는다. 인생의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간단한 영어는 알아 들을 수 있지만 긴 장문으로 된 영어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같은 회사 직원들이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영어로 대화할 때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요즘은 아들과 함께 인터넷에서 영어 강의를 듣는다. 다행히 남한은 교육시스템이 잘된 곳이라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배울 수 있다. 어린 아들이 가끔 “엄마 나이에 영어를 배워 어디에 쓸려고 그래요?”하고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빈정대는 아들에게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턱을 들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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