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주민에게 우유란 돈 많고 권세있는 특권층만 마실 수 있는 귀한 것이다. 1990년대에 태어난 북한 아이들 대부분은 우유라는 말조차 모르고 산다. 하루 세끼만 먹어도 다행으로 여긴다.
남한에 정착하여 커피숍에서 일하던 어느 날, 주문받은 음료를 만들려고 우유와 커피를 넣은 뒤 스팀으로 거품을 내는데, 거품이 적게 나왔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선배는 내가 만든 음료를 싱크대에 버렸다. 그 선배는 갑자기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의아해하는 나를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새 우유를 컵에 따라주었다. 아까운 우유가 쿨럭쿨럭 소리를 내며 싱크대 구멍으로 사라졌고, 그 소리는 내 가슴에 와서 맺혔다. 북한주민의 자식은 구경도 못하고, 맛도 모르는 귀한 우유를 버린다는 것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송구했다. 내가 “모아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는 “일단 한 번 만들고 남은 것은 다시 쓰지 않는다. 우유가 그리 귀한 것도 아니고, 커피값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며 웃었다. 우유 맛도 제대로 모르는 고향사람들 생각에 나는 남은 우유를 큰 컵에 모았다. 필요 없는 줄 알면서도 고향에 사는 고아들의 여윈 얼굴이 떠올라 차마 내 손으로 우유를 버릴 수가 없었다.
북한 애육원에서는 한 주에 한 번씩 젖소 목장에서 우유 10리터를 가져온다. 우유를 먹을 수 있는 대상은 갓난아기부터 5살까지다. 그런데 고아들 앞에 놓인 작은 우유컵에는 뿌연 물이 담겨있다. 말이 우유지 물에 우유를 탔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아이들은 물 섞인 우유를 단숨에 마신 뒤 마지막 한방울까지 먹으려고 컵을 핥는다.
보육원에는 신생아부터 만 8세까지의 아이들이 살고 있지만 우유 공급량은 매우 적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유와 물을 비슷한 비율로 섞은 다음 달달한 맛을 내는 사카린을 넣어준다. 보육원 원장은 고아들에게 “너희가 마시는 우유는 장군님 사랑이 담겨있다. 우리는 이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장군님 대를 이어 받들어 모셔야 한다”며 긴 연설을 한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교양원(북한에서 유치원 어린이들을 교육하여 학교 교육의 기초를 닦는 교사)이 아이들에게 “금방 마신 우유 맛이 어땠냐”고 묻는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방금 마신 달달한 우유”라고 말할 정도다.
세상이 무심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한반도에 같은 지맥으로 이어진 땅에서 남한은 우유를 물처럼 마시고, 북한은 우유를 말로만 들으며 자란다. 남한 아이들은 우유를 마시면서도 누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는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방 고등학교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좋은 땅에 떨어진 복 받은 씨앗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북한의 수많은 아이들은 우유 맛을 모르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들도 당신들처럼 우유를 마음껏 마시며 학교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도 우유를 마시고 학교로 가는 아들을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곳으로 인도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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