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으로 휘갈기고, 걷어차고, 야유를 퍼붓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허나 당신은 가장 사랑 많아 가장 약한 이. 빌라도의 심문 앞에서도, ‘못 박으시오’라고 질러대는 군중들의 아우성에도, 로마 병사들의 채찍질에도, 닭이 울기 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게도, 진정 사랑하였기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서 있는 어미양처럼. 당신은 그러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섰습니다. 태양이 선악을 훑고, 새가 양심을 쪼아댑니다. 그 죄와 고통으로 이 작고 아둔한 머리와 메마른 가슴으로도 깊은 참회의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당신은 햇살같이 감싸 안아주고, 바람같이 부비고, 눈같이 덮어주고, 비같이 울고 계십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잠언집 「바보가 바보들에게」 속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죽음은 어리석게 보이지만, 오늘의 세상에서 십자가보다 더 크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의 길은 사랑의 불을 지르는 길입니다. 이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자신을 불태우면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요 빛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던 그 사랑을 미약하나마 조금씩 알아갑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그렇게 가신 당신의 사랑 방식을 좀 헤아려 가고 있습니다. 탕자인 작은 아들을 먼발치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가 품어주는 아버지에게서 당신의 용서를 봅니다.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을 위해, 안토니 블룸이 쓴 「기도의 체험」 중 일부를 묵상해 봅니다. “네가 살아 있든지 죽든지 그건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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