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나는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지도교수님께서 논문 주제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름대로 수년 동안 마음에 두었던 논문 주제가 따로 있었던 터라, 내게는 정말 달갑지 않은 권고였다. 늘 마음 깊이 존경하는 분이었기에 “아니요”라고 말씀 드리기가 참 어려웠고, 결국 ‘찝찝함’을 떨어내지 못한 채 지도교수님의 말씀에 따랐다. 그때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북한 여성’을 주제로 했으면 좋겠어. 지금은 별로 의의가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10년을 내다보자. 분명 그때에는 수요(?)가 있을 거야. 아마도 많이….”
그분 말씀은 적중했다. 10여 년이 지나면서 그분 말씀이 그대로 현실이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래 북한의 식량난 등 경제난이 심화·지속되면서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 불법으로 중국까지 나섰던 북한 여성들의 국내 입국이 점점 많아졌다. 또한 2000년 6월 남북 정상이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의 이행으로 남북한 간 사회·문화교류가 활성화됨에 따라, 북한 여성에 대한 관심과 관련 연구가 한층 더 많아졌다. 사실상 내게 있어 이와 같은 동향은 그때의 ‘찝찝함’이 ‘쾌재’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쾌재’를 부르기에는 북한 여성의 현실이 너무나 놀랍고 안타까웠다. 대부분의 삶이 아주 어렵고 힘들었으며, 인권 유린과 침해 사례도 드물지 않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당시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 등 한반도 통일 환경이 긍정적으로 조성되고 있음을 주목하시고, 일찌감치 통일의 그날에 대비하라는 뜻에서 논문 주제를 ‘북한 여성’으로 권하셨던 것 같다.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북한 여성과 관련한 후속 과제도 떠올랐다. 예를 들면 ‘남·북한 여성의 생활(문화) 비교’ 등을 논제로 한 연구결과물들을 쌓아 남·북한 사회통합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래 다루어 온 북한 여성 관련 주요 논제는 ‘북한 여성의 인권실태’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수요(?)가 많아졌다고 ‘쾌재’를 부를 수 있겠는가!
북한 여성의 인권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났다. 특히 북한이탈주민 여성들을 많이 만나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은 심각한 인권 유린 침해 사례를 들었다. 그들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할 때면 새삼 분노로 치를 떨며 억울함과 분함을 토해낸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고 그냥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북에 두고 온 자녀 등 가족이 떠올라서, 또는 끔찍한 일을 겪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해서 절로 눈물이 난다고 고백했다.
북한이탈주민 여성들을 만나 그들이 겪은 일들을 듣고 나면 정말 외람스럽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주님께서는 정말, 어떻게 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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