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 바로 오늘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 현재 알제리에 살고 있는 외국인 전부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은 테러리즘에 제가 희생된다면 우리 공동체와 교회와 제 가족은 제 삶이 하느님께, 그리고 이 나라에 온전히 선물로 주어진 삶이었음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저의 이 죽음을 저와 똑같이 폭력 아래 죽어 가 무관심 속에 남겨진 이름 모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죽음에 묶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행히도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악에, 또한 마구잡이로 덮쳐올 수 있는 악에도 제가 ‘공범’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의 세월은 살아 왔습니다.”
1996년 5월 21일 알제리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무장 이슬람 집단(GIA)’에게 피살된 엄률 씨토회 일곱 수도자 중 크리스티앙 원장수사가 남긴 유서의 일부다.
광주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3년상(喪)을 치르는 세월호 희생자 시민상주(喪主) 모임이 있다. 이들은 매달 16일을 ‘기억의 날’로 정하고 마을별로 하는 촛불문화제, 2017년 8월 11일까지 1,000일 동안 매일 세월호를 기억하며 걷는 ‘빛고을 천일순례’, 세월호 재판에서 유가족과 함께 한 ‘진실마중 사람띠잇기’, 세월호 인양과 유가족, 미수습자를 위한 연대의 행위, 생존학생 쉼터 마련을 위한 하루 밥집 등 ‘남의 일’을 ‘나의 일’로 살아가면서 5·18때 보여 준 주먹밥 대동연대가 지역주의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밀양 송전탑 희생자요 반대 투쟁의 주역이신 ‘할매’들은 이제 연대의 전문가들이 되신 듯하다. 자신이 직접 피해를, 부당한 고통을 당하기 전에는 생각도 못했다던 ‘남들의 억울한 고통’을 찾아다니신단다. 이달 마지막 주간에는 제주 강정마을에도 가신다고 한다. 이들을 모시는 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소식을 들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용산참사 유족들과 철거민들이 합류하기로 했고, 청도에서 송전탑 반대를 위해 싸우시던 할머니들도 따라 나서신단다. 여기에 세월호 참사 가족들이 함께 하기로 하여 이른바 ‘MC SKY & SEWOL’ 연대가 강정에 모일 참인가 보다.
크리스티앙 수사의 유서는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의 세 가지 연대가 핵심이다.
삶에서의 연대, 죽음에서의 연대, 그리고 책임에서의 연대이다. 이 마지막 연대는 죄책감과는 다른 건강한 공범의식이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많은 이들이 “미안해요, 잊지 않을게요” 하고 말했던 이유와 같은 공범의식. 내 삶의 현장에서 돈과 힘을 갖기 위해 진실과 정의를 외면했던 모든 종류의 위선과 불의,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지배하고 희생하는 모든 형태의 이기심의 극대화가 바로 세월호 참사의 본질임을 인정하는 자들의 책임감이다.
투쟁과 운동을 넘어서서 생명의 새로운 질서를, 정의 평화의 새로운 문명을 이루면서 그렇게 빛고을과 우주를 생명의 그물로 엮어가고 있다는 세월호 광주 시민상주들의 우주적 가족의식과 생명연대는 가히 축제다.
할매들과 노동자들과 유가족들의 연대는 가해자들에 대한 원한으로 뭉친 피해자들의 단순한 동병상련과는 다른 차원에서 고통과 불의의 체험으로 열린 눈과 넓어진 마음들이 서로 형제자매로서 끌어안으려는 친교이다. 그 어둠과 아픔을 통해 이제 더 이상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니라 ‘너는 나, 나는 너’임을 깨달은 이들의 삶의 연대. 각각 자신의 억울한 고통의 경험 이전에는 관심도 없던 ‘남들’이었던 사람들이 ‘우리가 남이 아님’을, 너의 아픔이 너만의 것이 아님을 증명하며…
크리스티앙 수사와 세월호 광주시민 상주들과 MC SKY & SEWOL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이 모든 사람과 연대하고자, 모든 인간의 운명을 나누고자 우리의 살을 취하신 성자(聖子)의 연대를 알아들었다. 신학공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으로, 체험으로, 순수한 마음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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