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 첫해로 기억한다. 그해 추석 연휴는 주말이 이어 지면서 다소 여유 있게 정겨운 추석 일정이 시작됐었다. 일반 공기관이나 학교와 달리 개인 기업에 근무했던 탓에, 사장님 재량으로 또 한 이틀 정도 휴가가 주어져 그야말로 황금연휴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 여유만만한 내 처지를 보신 어머니는 일찍부터 장을 보시고 부침개 작업을 시작으로, 마음 놓고 일을 맡기셨다. 당시 우리 집 부엌은 지금처럼 실내에 싱크대가 설치된 모습이 아니었고, 이른바 부뚜막이 있고 외부와 연결된 구조였다. 문을 열고 나서 나지막한 장독대를 오르면 이웃집 부엌들이 들여다보였다.
일단 부엌문을 열고 연탄불 화로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고구마전부터 시작했다. 친구들과 약속도 미루게 하고 일을 시키는 어머니에게 투덜거리며 전을 부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은 그지없이 투명하게 파랬다.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었다. 잠시 장독대 올라 하늘을 보는데 옆집 부엌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들이 청량한 가을바람에 섞여 코끝을 간지럽게 했다. 그지없이 평화롭고 넉넉한 풍경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지금도 추석 명절의 여유와 훈훈함을 떠올릴 때면 그때 느꼈던 풍경과 감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한가위 당일에는 그야말로 대문짝만한 보름달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기억이 난다. 저녁을 먹은 후 가족들과 잠시 그 장독대에 올라 하늘을 바라봤다.
음식 준비를 하며 느꼈던 추석 명절의 푸근함이 또 다른 느낌으로 이어졌다. 나와 동생들은 어머니 신호를 따라,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성가를 낮은 소리로 불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고 장독대가 정겨웠던 그 집도 떠난 지 오래다.
이제 추석 명절이 다시 다가온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명절을 맞아 함께 보름달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덕담을 나눴던 그 날의 풍경은 되살리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만 살아간다면 삶의 각박함도 여유로움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