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ㆍ25 합의 이후 남북한 당국자회담 재개와 민간교류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남북한 최고 지도자의 대리인이나 다름없는 ‘2+2 채널’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비서가 얼굴만 맞대지 않았을 뿐 최고의사결정권자로서 합의 내용을 최종 추인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남북대화의 역사는 이러한 합의만으로는 이행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동시에 말해준다. 1953년 정전협정부터 이번 8·25 합의까지 남북간에는 240차례가 넘는 합의서와 공동보도문이 채택된 바 있다. 이러한 합의들이 모두 이행됐더라면 남북관계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남북관계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번 합의 이행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국자회담이 재개되고 민간교류 채널이 복원되더라도 어떤 의제들을 우선적으로 다룰 것인가 하는 점이다. 8·25 공동보도문을 통해 합의한 의제는 지극히 포괄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당국자회담 개최를 통해 논의하자고 합의한 것은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이고, 민간교류 활성화는 ‘다양한’ 분야에서 하기로 합의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 출범 후 우리 정부의 잇따른 대화 제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무응답으로 일관했던 데는 교류협력이 재개되더라도 서로가 원하는 의제에서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던 측면도 크게 작용했다. 북한은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등 굵직굵직한 경제적 이슈를 먼저 풀어야 다음 단계로 가겠다는 심산인데 비해 우리 정부는 환경, 문화, 민생과 같은 작은 통로를 먼저 열고 나서 다른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남북관계에서 이와 같은 의제 불일치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1980년대에도 우리 정부는 ‘선평화’를 내세워 비정치적 교류를 제안했고, 북한은 ‘선통일’을 내세우며 정치군사 의제를 먼저 다룰 것을 주장했다.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이러한 주장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진정성을 담은 대화 제의는 없었고 대화 공세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8·25 합의 이행과정에서도 북한은 정치군사 의제들을 내세우고 한미군사연습 중단과 상호비방 중지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인도주의적 접근과 ‘작은 통일에서 큰 통일로’라는 원칙을 고수한다면 의제 설정을 둘러싸고 상당한 시간을 허비할 공산이 크다는 말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의 교류협력 의제들을 동시에 테이블에 올려놓는 주고받기식 협상이 불가피하다. 대화 공세가 아니라 대화 의지가 있다면 평화를 위한 의제설정에 동의해야 한다. 또 이러한 접근방식이 DMZ 내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43시간 무릎을 맞댄 8·25 합의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성기영 박사는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연구실 연구위원으로 있으며, 서울 민화위 평화나눔연구소 연구위원,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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