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의방에서 초등학생 복사가 묻는다. “신부님은 손톱을 어떻게 깎아요?” 순간 혼란스러웠다. ‘대체 뭘 묻는 거지? 손톱 깎는데도 방법이 있었던가?’ “우리는 엄마가 깎아주는데 왼손은 몰라도 오른손 손톱은 어떻게 깎아요? ○○선생님은 손톱 깎다가 피가 났대요.” ‘아, 손톱 깎아줄 사람이 없는 신부님을 걱정해준 거니?’
사실 나는 손톱깎이에 대해 약간의 애착이 있다. 이 작은 도구는 섬세한 작업을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도록 매우 기능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좋은 날을 가진 손톱깎이로 손톱을 자르면 ‘딱’ 소리가 나지 않고 소리 없이 날이 손톱을 파고들어 부드럽게 잘라준다. 소리가 난다는 것은 손톱을 자른다기보다는 깨거나 부스러뜨리는 것이어서 단면이 거칠어지고 추가로 다듬어주지 않으면 손톱 끝이 갈라지거나 일어난다. 그래서 좋은 품질의 손톱깎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여행 중에도 가게에서 좋아 보이는 손톱깎이를 발견하면 일부러 구입하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손톱깎이의 품질은 좋아졌을 게 분명한데도 점점 손톱이 시원하게, 부드럽게 깎이지가 않는다. 처음에는 날이 무뎌졌나 생각했는데 어느 날 깨닫게 됐다. 손톱이 나이를 먹을수록 딱딱해진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현상이다. 풀이나 나무껍질도, 동물의 뼈나 가죽도, 살아있는 것들의 조직은 성장함에 따라 더 억세지고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그 대신 어릴 때 지녔던 유연성과 부드러움은 차차 잃어버린다.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세상에 적응하고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어린 시절에는 쉽게 상처 입고 부러지더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한 것이고, 성숙한 후에 세상의 위협을 견디며 다른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더 억센 단단함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선입견 없이 쉽게 받아들이고 유연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며 무모한 모험도 할 수 있는 것은 어리고 젊은 시절의 소중한 특권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더 큰 책임을 지고 더 큰 위험과 어려움을 견뎌내야 한다. 특히 가정을 이뤄 남편이나 아내, 아버지나 어머니 역할을 갖게 됐을 때는 더욱 그렇다. 더 이상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흥밋거리를 좇아 모험을 할 수 없다. 자기 주관과 목적의식을 확고하게 가져야 하고 판단도 분명해야 한다. 안전하고 탄탄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유연성도 필요하지만 낭창낭창한 가지로 기둥을 세울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는 딱딱해져야 한다. 세상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그렇다.
하지만 부드러움은 생명의 특징이다. 생명은 부드럽고 죽음은 딱딱하다. 생명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부드러워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딱딱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음 세대에 생명을 전해주고 그 생명을 지켜주기 위한 희생인지도 모른다. 또한 손톱이나 뼈가 단단해지는 것은 다른 부드러운 부분들을 보호하고 그 부드러움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딱딱해져야 하는 부분이 딱딱해짐으로써 다른 부분이 부드럽게 남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안의 어떤 부분들이 또 모르는 사이에 딱딱해져 있을까? 어깨의 뭉친 살 말고도 마음속 부드러워야 할 부분까지 딱딱해진 것은 아닐까? 살아온 시간 동안 쌓인 경험과 지식이 지혜와 용기의 든든한 뼈대를 마련하기보다 아집과 독선, 남을 판단하려는 마음의 단단한 껍질을 형성한 것은 아닐까? 든든한 뼈대가 활기차게 삶을 살아가고 옳은 일을 실천할 토대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두려움으로 굳은 근육이 내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험하고 각박한 세상이 우리를 굳게 만든다면 따뜻한 아버지의 품,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의 부드러움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린이와 같아져야 하는 부분이 그게 아닐까 싶다. 신부님 손톱까지 걱정해주는 상냥한 아이들의 마음이 어른들 욕심 때문에 억지로 딱딱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좋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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