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23일 오후 1시 정각 C-47 수송기가 중국 상하이 강만비행장을 이륙했다. 수송기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국무위원 이시영, 선전부장 엄항섭, 문화부장 김상덕, 참모총장 류동열 장군, 주치의 류진동 박사, 비서 김진동, 수행원 안미생 민영완 윤경빈 이영길 백정갑 선우진 장준하 등 15명이 타고 있었다. 김구는 27년 만의 환국이었다. 비행기 창 아래로 초겨울의 황해가 푸른 잠을 자고 있었다. 3시가 가까워졌다. 격정의 두 시간 동안 모두 말 한마디 없이 황해를 건너고 있었다.
너무 늦은 환국이었다. 좀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면 어수선한 국내정세 정리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 아 보인다. 한국이!” 광활한 푸르름 아래 거뭇거뭇한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 조국의 땅이 우리를 맞으러 온다, 우리를 마중하러.” 눈에 띄지 않던 솜구름이 버섯처럼 돋아나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는 서해안 섬들이 바다에서 솟아나는 듯이 옹기종기 떠올랐다. 옥색하늘이 엷게 풀어지고 남색바다가 치마처럼 퍼졌으며 섬들이 크고 작게 벌어지고 있었다, 수송기 기창에 조국이 가득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광복군의 힘으로 일제를 물리치면서 상륙하고 싶었던 조국의 육지가 드디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저곳이 조국 땅 김포반도구나.
임시정부 환국보다 석 달 앞서 8월 18일 새벽 3시30분경 수송기 C-47이 중국 시안 비행장을 이륙했다. 수송기에는 한국광복군 정진대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와 버드중령 등 미군 OSS대원 18명이 타고 있었다. 정식명칭은 군사사절단이었다. 비행기가 서해에 들어서자 이범석 장군이 펜을 꺼냈다.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왜놈의 포화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 부서지고 이 몸
찢기워도/ 찢긴 몸 이 연안에 떨어지려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치 않으리/ 우리의
연해 물 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테니
정오 무렵 여의도비행장 활주로 끝에 멈춘 비행기에서 22명이 내리자 착검을 한 일본군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일왕 히로히토가 포츠담선언을 수락한지 사흘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의 군사권과 치안권은 일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날 밤 여의도 비행장 경비사령관 시브자와 대좌와 우에다 소좌 등이 맥주와 일본 술을 들고 막사를 찾아왔다. 분위기가 익을 무렵 시부자와가 무릎을 꿇고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에게 술을 권했다. 항복주였다. 그 밤 장준하는 난생처음 술을 마셨다. 일본군이 광복군에게 항복의 예를 취한 오직 한 번의 술잔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은 임시정부 자격이 아니라 개인자격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이들을 맞이한 건 미군병사 몇이었다. 여의도비행장 도착 직후를 광복군 대위 장준하는 항일수기에 이렇게 적었다.
“시야에 들어온 건 벌판뿐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 나의 조국은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나는 소처럼 힘주어 땅바닥을 군화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우리 국기, 환상의 환영인파, 그 목 아프도록 불러 줄 만세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검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서울시는 광복 70년을 맞아 광복군 정진대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타고 온 것과 같은 기종인 C-47 수송기를 여의도에 전시했다. 비행기가 서 있는 위치는 70여 년 전 수송기 바퀴가 땅에 닿은 지점에서 멀지 않다. C-47 수송기가 서 있는 여의도에 11월의 초겨울 바람이 분다. 이 땅에서는 지금 올바른 역사, 자랑스런 한국을 가르친다며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는 정책이 추진 중이다.(본문은 수송기 설명 게시내용을 재구성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