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성탄 전야가 되면 우리 꼬마들은 교리 선생님과 함께 밤미사 전까지 교우 집을 돌며 ‘성탄송’을 불렀다. 그때에는 왜 그리 추웠는지. 꽁꽁 얼은 손과 발을 동동 구르며 찾아간 집집마다 천상 아기의 평화를 빌며 성탄 성가를 기쁘게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든 때…” 신자 어른들은 우리 성가 소리를 듣고 대문 밖에 나와 과자나 돈을 선물로 주었다. 내 기억 속 성탄의 밤은 고요하고 거룩하며 평화로웠다.
하지만 성탄의 밤은 정말 성가 제목처럼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인가? 아니다. ‘혼란의 밤’, ‘불안한 밤’, 그 어떤 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밤’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첫 성탄의 밤이 어땠는지. 헤로데는 물론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렸다. 갓 태어난 메시아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거짓과 위선이 넘실거리고 사악한 음모가 꿈틀거렸다. ‘거룩한 것’을 내세워 ‘거룩한 것’을 없애려고 한다. 헤로데 임금의 명령에 따라, ‘거룩한 것’을 다루는 사제들과 율사들은 ‘거룩한 책’에서 결정적인 단초를 찾아낸다. ‘베들레헴!’ “가서,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 경건함으로 포장된 인간들의 악의가 죽음을 낳는다. 생명의 주인이 태어난 ‘거룩한’ 이 밤은, 다른 작은 이들, 베들레헴의 아기들에게는 ‘잔혹한’ 밤이 되었다.
이 잔인한 현실을 동방 교회의 성탄 이콘은 잘 담고 있다. 성모님 옆에 있는 아기 예수를 세밀히 보면, 구유는 돌관이고 포대기는 죽은 자들이 입는 수의다. 이콘 저자는 성탄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첫 성탄의 밤은 생명과 죽음, 기쁨과 고통, 거룩함과 잔혹함이 교차하는 ‘십자가의 밤’이었다. 천상 아기는 빛과 어둠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 밤의 혼돈을 온전히 당신 십자가 안에 품으셨다. 복음서는 그날 밤 일어난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토록 오래 기다린 ‘세월호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 정부측 증인들의 한결같은 소리다. 그렇게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저들이 하나같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란 말인가?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증인으로 나온 민간 잠수사들은 그날 일어난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는데. 공중파 방송들은 의도적으로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인용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이 들린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그런데도 우리는 내심 목가적인 성탄 분위기에 잠겨들고 싶어 한다. 이 속내와 함께 이기적인 충고의 소리가 우리 안에서 들린다. ‘그냥 가만히 있어, 헛수고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타협하라고!’ 체념과 의심의 무기력만이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보고 듣자니 불안하고, 도저히 참아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이란 정중앙에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울음도 웃음도 없으며, 찬양도 탄식도 의심도 없고, 희망도 가벼운 유머도 전심을 다하는 기도도 없다. 모든 것이 중간쯤에 엉거주춤 머무를 뿐이다. 성탄 밤에 깊이 새겨진 십자가의 고통 앞에 우리의 값싼 믿음, 값싼 의심, 우리의 민낯은 설 자리가 없다.
마틴 슐레스케는 말한다. “십자가는 엄청난 호소력을 지닙니다. 십자가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신의 영광이 아닙니다. 강한 자의 성공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시련을 겪는 자가 보여 주는 믿음이며, 억압당하는 자가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또 부름 받은 자가 보여 주는 충성이며, 조롱당하는 자가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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