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에페5,16)
말씀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내 책상에는 하루 성경 한 구절을 읽게 제작된 「바오로의 해 기념말씀달력」이 있다. 달력의 12월 24일자 말씀은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립시오’(에페4,31)였다.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내는 우울한 마음을 말씀으로 추스르며 페이지를 넘기는데 바로 뒷면이 1월 1일자였고, 말씀은 그곳에 있었다. 분노와 증오를 다스리라는 성탄말씀과 악한 때니 시간을 잘 쓰라는 새해 첫 말씀 사이에는 시점과 의미의 절묘한 연관이 있었다. 버리되 잊지 말라는, 사랑하되 행동하라는.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니 이내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 2월이면 대학원을 졸업해야 하는데 아직 취업하지 못했다. 대학원까지 연장하며 언론인이 되어 좋은 세상 만드는 꿈을 키웠는데. 더구나 가슴 가득한 고민과 불안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학교에는 갓 대학을 졸업한 뒤 진학한 학생이 다수지만 직장생활을 하다 평생 간직해 온 언론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용기를 낸 나이 서른 전후의 학생들도 많다. 한 남학생은 두 번째 방송사 최종 4차 면접까지 갔으나 실패했다. 2년간 특정 언론사를 목표로 했던 여학생은 이번에도 시험에 낙방하고 내게 전화하며 펑펑 울었다. 지난 학기 내내 아이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아이들보다 오히려 내 가슴이 더 타들어갔다.
어렵게 대학에 입학한 뒤 학비를 벌기 위해 최저임금노동을 했으나 빚만 졌다. 회사가 요구하는 온갖 스펙을 쌓고 다시 시작된 입사시험은 바늘구멍이고 그나마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에서 내 집 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한 5포 세대를 지나,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 세대까지 이르렀다. 더 이상 성공신화가 불가능한 ‘금수저’로 상징되는 상속주의 세상이다. 자신이 ‘흙수저’임을 절감하는 학생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네 능력 탓이니 더 노력하라는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위로의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 청년들의 현실을 옆에서 바라보며 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묻곤 했다.
상담을 하러오는 학생들에게 ‘삶은 내 두 발로 이 땅을 우뚝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일’이라며 진정한 네 길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다시 홀로 서라고 조언한다. 하늘을 우러르란 말 속에는 부디 기자, 피디가 돼 언론을 바로 세우고 사람중심인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내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울며 전화한 학생에게는 소주잔 기울이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을 권했다. 여학생은 생애 처음 혼자 동해로 여행을 떠났다. 암울했던 현업시절 방송사를 떠나려던 나에게 제 자리로 돌아가라 가르쳤던 설악산 울산바위의 독야청청 겨울소나무를 찾아서. ‘이 소나무인가요? 아니면 저 소나무요?’ 여행 내내 카톡으로 소식을 전하던 아이는 돌아와서 다시 자신과의 싸움에 돌입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마라톤 풀코스를 시작했다. 외로운 길이지만 씩씩하게, 고맙게도.
새해의 상징은 새로운 희망이다. 같은 해지만 지난해보다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며 계획도 세우고 각오도 다지는 건 마음 때문이다. 청년은 이 땅의 미래다. 청년들이 꿈꿀 수 있도록, 실패해도 다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 스칼렛은 지쳐 쓰러져 울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이렇게 말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그렇다, 세상이 암울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새로운 출발은 마음속의 분노와 증오를 다스리는 일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악한 때, 한 해 시간을 아껴 잘 쓰자. 역사의 현장에서 기성세대를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연 세력은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이여, 다시 꿈을 꾸어라, 일어서서 세상을 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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