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수품 50주년·주교수품 25주년
제10대 대한민국 주재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가 올해로 사제수품 50주년·주교수품 25주년을 맞이했다. 그는 2월 20일이면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다. 주교수품 25주년 은경축은 1월 6일이었다.
그의 가정에서는 신앙의 유산이 풍성히 이어져왔다. 할아버지의 형제 중에도 어머니의 형제 중에도 사제가 있었다. 파딜랴 대주교의 13남매 중에선 그와 남동생이 사제의 길을 걸었다. 특히 파딜랴 대주교는 필리핀교회가 처음으로 배출한 교황대사였다. 그의 동생 또한 필리핀 출신으로는 세 번째 교황대사로 활동 중이다.
“‘너는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사제가 되는 것이다. 가족들을 생각하지 말고 떠나거라.’ 제가 이탈리아 로마로 공부를 하러 갈 때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사제로서의 직무를 되새길 때마다 잊을 수 없습니다.”
파딜랴 대주교는 어린 시절부터 필리핀에서 사목을 펼치길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사제로서의 지난 50여 년간 세계 각국 교황청 대사관에서 봉사해왔다. 필리핀만 빼고 말이다.
오랜 시간 교황대사로서 활발히 활동해올 수 있는 힘은 하느님을 향한 ‘희망’에 뿌리를 둔다. 그는 사제품을 받을 때 ‘희망’을 모토로 선택했다. “하느님께서는 선이시기 때문에 사제는 희망하는 사람”이라면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젊은 사제는 오로지 희망할 수밖에 없다”고 회고했다. 주교품을 받을 때는 성소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이유로 ‘신앙의 덕’을 더욱 깊이 되새기고, ‘믿음과 희망 안에 굳세어라’는 구절을 선택했다. 그는 “이 성구는 제 영성생활에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해준다”고 말한다.
교황대사는 명예가 아닌 봉사직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대로 교황대사의 직무는 명예가 아니라 봉사입니다.”
파딜랴 대주교는 “교황대사 역할의 핵심요소는 ‘만민 선교’”라면서 “지난 모든 세월 동안 저의 임무는 지역교회에 교황님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지역교회에 봉사하며 주교들의 직무를 돕고,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교황 성하께서 바라시는 평화와 화해, 자비와 연민의 실천을 돕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실 공개적인 금·은경축 미사나 행사 등을 바라지 않았었다. 그는 “신부로서 주교로서의 기념일은 순전히 영적인 것이고,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섭리로 이뤄진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교황대사는 교황청과 각국 정부 간 유대관계 발전을 위해 활동한다. 동시에 각 지역교회와 보편교회 간 협력을 강화하는 등의 소임을 실천한다. 따라서 교황대사는 다른 국가 대사들과 달리 국가 간 경제적 이해관계 등에 얽매이지 않고 각 국가의 안녕에 힘쓸 수 있다. 각 나라에 머무르며 교황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 나라와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의 영적 복지를 위한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면 각각의 국가적 상황에 따라 어려움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파딜랴 대주교가 교황대사로서 파나마에 처음 부임한 해는 파나마가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된 첫 해이기도 했다. 스리랑카에서도 인종간 무장 분쟁으로, 나이지리아에서도 대사관 이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각 교황대사들이 어떤 대륙 어떤 나라에서 활동하고 어떤 교회 안에서 살아갈 때라도 공통된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전례에 참례하며 하나임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영적 여정
파딜랴 대주교는 “2008년 한국에 부임한 이후의 세월은 큰 영적 위안의 원천이 됐다”고 강조했다. 한국 신자들의 신앙과 지역교회 발전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하느님 섭리로 시작돼 계속 증진돼 왔음을 알게 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특히 한국교회 신자들이 항상 밝게 웃으면서 봉사하는 모습에 큰 기쁨을 누려왔다고 밝혔다. 외국교회 손님들도 서울 명동성당 등지를 방문할 때면 성사를 보기 위해 고해소 앞에 길게 줄지어 선 신자들의 모습을 매우 인상 깊게 느낀다고 전했다.
“신자들의 행복과 웃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국 주교님들과도 자주 이야기하곤 합니다. 또한 한국교회에는 젊은 주교님들도 많이 계셔서 미래의 기대와 기쁨을 품게 합니다.”
파딜랴 대주교는 “한국교회는 활기와 풍부한 성소, 조직적인 교리교육과 양성 프로그램, 다양한 본당 공동체 활동 등의 장점을 보인다”면서 “하지만 한국교회 또한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우리 신앙의 영적 가치를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고 당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상기시켜 주셨듯이,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은 역사적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영성생활에 영향을 주는 살아있는 도구, 선과 신앙을 위한 희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나라가 복음화 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파딜랴 대주교는 “예를 들어 필리핀교회가 설립되는 데에는 스페인 선교사들의, 베트남교회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이 컸지만, 한국교회는 한국인들이 씨를 뿌리고 키워왔다”면서 “한국교회의 이러한 독특한 역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고 격려했다.
현재 한국교회가 세계 90여 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의 복음화 노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 파딜랴 대주교는 “한국교회의 장점들에 관해 내적(ad intra) 성찰을 이룰 때 이웃 나라들을 향한 외적(ad Extra) 헌신이 가능하다”고 조언한다.
함께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
그는 매일 한국과 한국 국민들을 위해 기도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도도 빼놓지 않는다.
특히 파딜랴 대주교는 “평화란 외적인 국제적인 평화만을 말하지 않는다”면서, “한국 국민들 각 가정 안에 내적 평화가 깃들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이혼가정, 결손가정 등 안정과 위로가 필요한 가정을 항상 기억한다고 말했다.
올해 ‘자비의 희년’을 보내면서는 한국 신자들에게 ‘자비의 올바른 의미를 되새기자’고 당부했다.
파딜랴 대주교는 “많은 이들이 ‘자비’라고 하면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받고 용서를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자비도 사랑도 내가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비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습니다.”
▲ 1948년 첫영성체날.
(주교회의 미디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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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서 가족들과 함께.
(주교회의 미디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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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로마서 사제서품.
(주교회의 미디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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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주교서품.
(주교회의 미디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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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스리랑카 교황대사로 파견.
(주교회의 미디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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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가 지난 2014년 8월 주한교황청대사관 응접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주교회의 미디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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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는
오스발도 파딜랴(Osvaldo Padilla) 대주교는 1942년 필리핀에서 태어나 세부대교구 소신학교와 신학교를 비롯해 마닐라와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수학했다. 사제품은 1966년 로마에서 받았다. 신학 석사와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68년 교황청 교회학술원(교황청 외교관 양성센터)에 입학해 1972년부터 교황청 외교관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스리랑카와 아이티, 나이지리아, 아일랜드, 멕시코,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관 서기관과 참사관으로 활동했다. 1990년에는 피아 명의 대주교로 임명됐다. 이듬해 1월 6일 주교품을 받고 파나마(1990년~)와 스리랑카(1994년~), 나이지리아(1998~), 코스타리카(2003년~) 주재 교황대사로 사목해왔다. 대한민국 주재 교황대사로서는 2008년 7월 18일부터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현재 몽골 주재 교황대사도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