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 고(故) 김수환 추기경께서 열정적으로 공의회 정신을 전파하시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카리타스 전(前) 사무국장 최재선 선생님 기억에 따르면, 추기경께서는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가 창설되던 즈음 마닐라에서 하셨던 한 강연 덕분에 필리핀에서도 매우 큰 명망을 누리셨다고 한다.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의 취지는, 공의회가 교회에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자의식(自意識)과 관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한 교회’(Ecclesia pro vita mundi)라는 것이다. 지금은 다소 밋밋하게 들리는 이 언명이 당대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과도 같은 신선함으로 다가간 이유는, 이 교회상이 이전까지 교회가 사람들에게 비친 모습, 즉 ‘자기 자신을 위한 교회’(Ecclesia pro se ipsa)와 큰 대조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조직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세상 대부분의 집단은 자기 생명이나 영역의 보존과 확장을 꾀한다. 따지고 보면 이 점에 있어서는 개인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길 우리가 줄창 듣는 것도 바로 이 맥락에서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으로 “고삐가 풀린”(senza freni) 상태에 있는 현재의 물신적(物神的)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 ‘경쟁’ 역시 최소한의 고삐마저 풀어헤치고 ‘무한경쟁’의 상태로 돌입한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자리에 들어가 앉은 ‘성공’의 더 충직하고 효과적인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교회(와 그 안의 모든 공동체들) 역시 온통 시장논리로만 돌아가는 세상을 복음화하기는커녕, 거꾸로 이 세태(世態)에 의해 세속화 혹은 시장화할 위험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더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탄식을 뜻있는 개신교 형제자매들에게서 근래 자주 듣는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건대, 그게 남의 동네 이야기로만 그치랴. 교회는 이른바 ‘세속화’한 세상에 대한 우려를 자주 표명해왔으나, 시나브로 교회의 세속화가 더 염려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고 해야 정직한 진단이 아닐지. 사실 이점에 대해서도 생전의 김 추기경은 깊은 우려를 표명하신 바 있다. 교회가 세상의 생명보다 자기 자신에게, 즉 자신의 보존과 확장에 더 깊은 관심을 둘 때, 겉으로 암만 세상 ‘바깥’ 어딘가 탈속(脫俗)한 지점에 있는 듯 보여도 사실은 구제불능의 속물(俗物) 자리에 있는 것이다.
「사목헌장」에 따르면 성과 속을 가르는 경계, 그것은 (봉쇄수도원의 울타리 같은) 외적경계가 아니라 내적경계이다. 세상의 생명과 복음화를 위해 더 깊이 세상 안으로 들어갈수록 (혹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대로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가난한 변두리로 나갈수록”),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저 ‘자기보존과 확장’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진다. 더 철저히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바쳐질수록, 교회는 정녕 세상과 ‘다르게’ 존재한다. 그 ‘다름’이 바로 교회의 거룩함이요 존재 이유다.
그렇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그 신부요 제자인 교회 역시 ‘세상을-위한-존재’(D. 본회퍼)로 살아야 한다. 소금과(마태 5,13) 누룩처럼(마태 13,33), 밀알과(요한 12,24) 비처럼(신명 32,1-3), 교회공동체는 세상 안에 스며들고 배어들어 죽고 스러지면 그게 참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만 교회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이 된다. 과연 교회는, 외적으로는 세상 ‘안으로’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가야 하고, 그러면서 내적으로는 세상과 ‘다르게’ 존재해야 한다. 세상 안에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요한 17,15-16 참조) 교회의 모습이 이런 것이니, 교회의 거룩함도 종국에는 여기서만 증언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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