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은 2000년대 이후에도 갈등이 약화돼 화해 협력으로 나가는 듯하다 군사적 대치와 적대 관계가 되풀이되면서 분단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지난 북한의 4차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남북한 화해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폐쇄됐다. 북한은 이 지역을 군사통제구역으로 선포하고 공단 조성을 위해 후방으로 물러났던 군에 의해 출입을 통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개성은 38도선 아래에 위치해 6·25전쟁 이전에는 남한에 속했다. 당시 38선은 송악산 정상을 통과하고 있어서, 경계선상에서 선전포고 없이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할 때, 38선에서 5km 남짓 아래 위치한 개성은 5시간 만에 빼앗겼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이곳을 수복했지만 중국군 개입 이후 다시 빼앗겼다가 끝내 탈환하지 못했다.
공단이 건설되기 전에는 개성 지역에 북한군 제2군단 6사단과 62포병 연대 등이 주둔했다. 전후에도 북한군은 개성을 서울을 향해 공격할 수 있는 북한의 주요 전진기지로서 서부전선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2000년 6월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한이 합작해 개성에 공단을 건설했다는 점은 군사적 대결을 벗어나 남북한 긴장완화와 교류를 위한 매우 큰 가시적인 성과였다. 개성공단은 리빙아트·평화제화 등이 입주해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북한 핵개발·천안함 격침 사건 등으로 개성공단이 중단될 위기를 겪었지만, 이곳은 북한에서 파견된 근로자가 5만 명을 넘는 규모로 발전해 왔다. 공단 가동 이래 2015년에는 처음으로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총생산액이 5억 달러를 돌파했다.
김정은 체제에서도 그동안 개성공단이 유지돼 와서 그야말로 남북한 완충지대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경제협력을 통한 남북한 군사적 대결 완화가 무르익기 전에 개성공단이 폐쇄됐다. 이 공단은 장래 남북한 긴장완화를 위해서나 남북한 이질화와 통일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도 계속 필요하다. 남북 교역이 중단되면 북한과 중국의 무역이 더욱 크게 늘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개성공단에서 기업을 운영했던 모 대표는 공단 입주가 “기쁠 때보다는 힘들 때가 더 많았지만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개성공단의 싹이 잠시 사그라지겠지만 언젠가 다시 자랄 것”이라고 희망을 나타냈다. 그러한 그 희망은 적대적으로 대치한 최일선이었던 접경지역을 평화 특구로 만들려 했던 공단 건설 당시의 열망으로 돌아가야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휴전협상 당시 북한 대표였고, 전후에 외상과 부수상 등을 지냈던 남일이 1951년 11월 “정전의 유지는 무력균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양측의 신실성에 놓여 있다”고 한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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