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개체화(個體化)의 원리’는 매우 중요한 탐구 주제였습니다. 각각의 인간은 개인 안에 나름의 ‘동일성’이 있어서, ‘사람’이라는 일반명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 사람’이 지닌 ‘개체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지요. 왜냐고요?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들의 본성’ 등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철학적 주제를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히 개체화되어 버린 현대의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하려고 엉뚱하지만 철학적 단어들을 살짝 끄집어 내 놨습니다.
제가 ‘개체화’라는 단어를 내밀었을 때, 여러분들 중에 고개를 갸우뚱하신 분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철학에서는 흔하게 듣는 단어입니다만 일상에서 들을 수 없는 단어가 주는 생소함이었겠지요. 어쩌면 이 글을 읽으시려고 신문을 펼치셨던 독자들이 제 글의 흥미를 잃고 그냥 지나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모형을 지닌 채, 나누는 대화가 생산적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 중에 ‘못.친.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단어의 뜻을 몰라서, 그 방송이 어떤 방송인지 관심조차 없었지만 꽤 인기가 있었나 봅니다. 방송만이 아니라 요즘 학생들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신세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저는 이제 구세대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 stein)이라는 철학자는 동네 아낙들의 대화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독일어를 곁듣고서, 언어라는 기호를 통해 인식에 이르려면 단순히 단어를 알아서만이 아니라 언어가 지닌 실천적 규칙을 알아야만 하고, 여기에 교차되는 화자(話者)의 비언어적 실천(말투, 몸짓 등)까지도 인식할 수 있어야만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간파합니다.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통’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립니다. 상대방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서, 서로 다른 언어게임을 하는 중에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소통은 커녕 상대의 언어규칙과 비언어적 규칙을 인정할 수 없어서, 오로지 자신의 입에 담겨진 단어를 이해하라고 윽박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강압적 힘이 효과를 얻지 못하면, 가정이라는 공동체마저 증오와 분노를 키우다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지역과 세대 간에 서로 다른 삶의 유형과 형태를 무시한 채, 조롱과 협박을 일삼기도 합니다. 태어난 환경에 따른 성장 배경의 다름이 그 자체로 아픔이 되기도 하는 우리 사회가, 그저 동일한 하나의 언어를 쓰고 있다는 이유로, 과연 소통이 당연히 가능한 나라입니까? 정치도, 경제도, 어린 청소년들의 학업도, 정보화에 따른 인터넷 세상도 모두가 오히려 ‘개체화의 원리’가 되어 분열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더 이상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공동체가 아닌, 서로 다른 언어게임에 빠져든 조각난 사회들이 공존하는 우리나라에 교회 공동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는 늘 ‘공동체적 구원’을 선포해 왔습니다. 그 교회 안에는 갈라진 사회를 이어 깁는 공동체적 노력이 경주되고 있습니까? 서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마주서 이웃이 되어주고,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서로 어색하지 않게 담소하고 차를 나누어 마실 수 있는 공동체입니까? 세대 간 아픔을 넉넉한 품으로 품어주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교회마저 특정한 언어모형을 지닌 채, 우리만의 언어게임에 빠져버린 그저 또 하나의 사회들 집합이 되어버리고 나면, 이제 우리나라에서 공동체를 꿈꾼다는 것은 몽환(夢幻)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의 가득한 소통 부재 속에 ‘북한의 핵문제’와 ‘개성공단 문제’를 마음에 품어 봅니다. 이제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북한과는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서로의 아픔과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 조차 어불성설이 되어 버린 겁니까? 자신의 정당성과 아픔만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나면, 인간 삶의 기초 공동체인 가정에서조차도 공동체적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내 아픔이 아니라 타자의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의 자리를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이 소통의 시작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소통은 언어가 아니라 ‘공감하는 마음’(sympathy)임을 사회의 어른들이 다시금 마음에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