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우리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신의 정책을 홍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야 하는 순간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요란함과 어수선함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이들의 ‘사유’와 ‘신념’이 대한민국이라는 유기체적 공동체를 향해 외치는 로고스(진리로서의 말씀)가 아니라,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느라 싸우는 치졸한 아우성일 뿐이라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국민이 있어 생명력을 유지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유기체적 공동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눈 먼 지도자들이 지르는 탐욕의 고성이 요란하게 울릴 뿐, 그들의 외침에 국가와 국민을 위한 그 어떠한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법률」에서 국가의 최우선적인 의무는 “신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며, 그리고 나면 잘살든 못살든 그에 따라 살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가르치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플라톤은 ‘올바른 신(神) 관념’을,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통하여 삶으로 나아가라고 가르치시지만, 이러한 가르침을 한 개인의 신념과 신학적 시선에서 사회적 관점으로 환원시켜보면 ‘올바른 철학’이 정치와 삶에 앞서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힘없는 영유아들은 부모들의 폭력에 시달리고, 학생들은 무한경쟁에 내몰려 스스로의 미래를 너무도 간단히 포기하고서 사회에 부유하기를 자처하며, 대학생들은 학문에 매진하기보다 알바와 스펙을 위해 진리를 비웃는데, “도대체 우리 사회가 ‘우리의 미래’에게 가르치고 공감할 수 있는 신념이 있을까?” 자조 섞인 물음을 던져봅니다.
독일에서 한창 수업을 들을 때, 슈투트가르트(Stuttgart)를 주도로 하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지사를 오랫동안 지내셨던 에르빈 토이펠(Erwin Teufel)과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당신의 정치 철학은 무엇입니까?”라고 제가 뜬금없이 물었는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나에게 정치는 대화를 통하여 국민들에게 돌아갈 최악의 경우를 막아내는 일입니다”라고 하시던 그분의 말씀이 제 가슴을 울렸었습니다. 사실 그분은 전문적으로 대학에서 그 어떠한 공부도 해본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현직에서 물러나신 후, 제가 공부하던 학교에서 처음으로 대학 공부를 시작하셨던 만학도셨습니다.
국가는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수호하기 위해, 올바른 철학이 있어야 하고, 그 위엄 있고, 공감 가는 철학 위에 ‘부동산 정책’이든 ‘경제정책’이든 ‘교육정책’이 가능할진대, 정치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의 요란한 외침은 그저 우리나라의 경제가 위기에 놓여 있고, 나를 뽑아 ‘잘 살아봅시다!’가 거의 전부인 빈곤한 사유에 어떻게 올바른 정책과 미래의 비젼을 보겠습니까? 게다가 유권자들은 그렇게 알량한 선전에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공감할 수 있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 살아보세!’라는 신념은 결코 철학이 아닙니다. 어쩌면 올바른 삶의 결과로 빚어지는 결실일 수는 있겠지요.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불쾌하시거나 저의 초라한 언변에 ‘철학이 밥 먹여 주냐?’며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정과 교육에 대한 올바른 신념이 없는 지금의 문제를 그저 임시방편으로 해결해보려는 억지스런 정책들은 결국 우리의 미래를 송두리째 저당 잡아야만 하는 어리석은 일임을 우리는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철학 없는 정치’를 반성하고 성찰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얼마 전, 알파고와 바둑을 두면서 이기든 지든 밤새 자신의 수를, 아니 자신의 바둑 철학을 밤새며 수없이 복기(復棋)했다고 인터뷰하던 이세돌 기사의 말이 떠오릅니다. 바둑 한 판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복기이건만, 우리나라 전체를 건 승부수에 복기 없는 한 수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 함께 고민해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