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전례력으로 2000년 대희년을 맞을 직접 준비 기간(1997~1999)의 두 번째 해인「성령의 해」를 시작하면서「성령」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한국주교회의 2000년 대희년 주교특위 위원인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특별기고「성령의 해 1998년을 앞두고」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장익 주교는 특별기고를 통해 성령의 활동이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범위 밖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성령에 대한 풍부하고 새로운 인식을 심화시켜 준다. 장주교는 특히 유다교와 회교 같은 유일신 종교와 동양의 고등종교인 힌두교의 전통에서 성령을 어떻게 알아듣고 말하고 있는지를 설명, 성령에 대한 가톨릭 신앙인의 믿음의 지평을 넓혀준다.
이제 우리는 2000년 대희년을 맞을 직접 준비 기간(1997-1999)인「그리스도의 해」,「성령의 해」,「아버지의 해」의 중턱인 둘째 해에 곧 접어든다. 오는 대림절(11월 30일)부터 시작되는 성령의 해는,「제 삼천년기」가 가르치듯이,「성령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포함」하는 해이다. 그런데 성령께 대한 우리의 깨달음과 신심을 새롭게 하고 심화하기에 앞서 함께 생각하고 넘어가면 도움이 될 것이 여기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밖의 여러 회칙을 보면, 성령의 현존과 활동이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시적 범위 밖에서도 드러난다고 하였다. 성령의 그러한「그느르심」(사목헌장 92항)에 부응하는 길로 공의회는 이처럼 종교간의 대화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 바오로 2세도『다른 종교들과 현대 문화와 나누는 대화에 대한 관심의 증가』(제 삼천년기 46항)를 촉구하였다.
이제 이 대화에 더욱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임하기 위해 다른 유일신 종교(특히 유다교와 회교) 기타 동양의 고등종교(힌두교) 전통에서는 성령을 과연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지를 한번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종교에서는 물론 천주교에서처럼 성령을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들 나름의 신앙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뜻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유다교의 신앙유산을 더욱 존중하고 깊이 알면 교회 생활의 여러 측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앎이란. 신약이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교 전승이「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신다」고 신봉하는 성령의 신비와도 관련된다.
비록 히브리 성서가 성령을 위격으로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과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으로 여기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성령신학은 유다교의 이러한 신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와 교리에 있어 그러한 연계를 상기시키면서 그 중요한 요소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 이름:「(성)령」이라는 낱말은 히브리어의 「루아흐」라는 단어를 그 일차적인 의미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즉, 숨결 공기 바람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예수님도 니고데모에게「바람」이라는 감각적 표상을 통해 하느님의「숨」이신 분, 곧 신적인「영」의 초월한 새로움을 암시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91항).
그분은 세상 안으로「들어오시」면서 동시에 이를「초월」하시는 분, 역사 안에서 작용하시면서도 역사와는 다르신 분, 역사의 이치에 매일 수 없으면서도 또 다른 하나의 이치를, 곧 남을 향한 책임과 사랑의 이치를 세우시는 분이시다.
2) 질서를 세우시는 일:『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영이 휘돌고 있었다』(창세 1, 1~2).「하느님의 영」은 이렇듯 형상이 없는 세상 위에 내리시고 그 내림이 곧 창조의 기적이다. 혼돈이 우주가 되고 무질서가 질서가 되는 것이다.
3)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일:『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숨을 쉬었다』(창세 2, 7). 단지 흙-조물이던 인간에게 하느님 영이 들어가자 그 숨결의 결과로 그는 한갓 조물이 아닌 산 존재로, 하느님 모상을 지은 하나의 상대로 변신한다. 하느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시고 그에게 말씀을 건네시며 세상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맡기신다.
4) 그느르시는 일:『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이사11, 2). 하느님의 영은(대조, 판관, 왕, 예언자, 현녀와 현인 등) 특정인들을 사로잡는다. 그들에게 특수한 은사를 베푸시어 세상을 이끌면서 하느님의 뜻을 정통하게 풀이해 주는 기능을 발휘하게 하신다.
5) 낫우시는 일:『나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 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 36, 26~27). 인간 안에 영이 내리면 그를 새롭게 하고 낫우시며, 죄를 이기고 그를 하느님과의 계약 상대방이 되고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6) 보편적 차원:『나는 내 영을 만인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마저 나의 영을 부어 주리라』(요엘 3, 1~2). 온 인류가 영에게 사로잡힐 날이 올 것이니 그 날은 메시아의 시대와 때를 같이 하리라.
7) 오순절:『오순절 날이 되자…그들(제자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사행 2, 2ㆍ4). 부활하신 분의 영이 내리게 된 일은 유다인의 오순절(샤부옷)과 때를 같이한다. 오순절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을 경축하는 날이다. 부활하신 분의 영은 시나이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새로이 발효시키는 것으로, 하느님과 인류 앞에서의 책임을 져 세상 안에서 올바름과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거룩함의 성령
「성령」이라는(수식 형용사가 붙은) 이름 자체는 히브리 성서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히브리 성서에서는 오직 소유격과 맺어진 영이 일컬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창세의 경우는 하느님의 영(루아흐 엘로힘)으로, 하느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말할 때는 야훼의 영(루아흐 야흐웨) 등으로 쓰이고 있음을 본다. 예외가 있다면 단 두 번 거룩함(지존)의 영(루아흐 꼬데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거룩함이란 곧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이사 63, 10이하: 시편 51, 3).
창조에 있어 이 영은 만유의 혼돈에 질서를 세우는 비롯함이다. 곧「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첫 계시, 이를테면 앞으로 있을 계시의 씨앗」인 것이다. 네오피티 타르쿰(아람말로 옮긴 성서)에 보면『하느님의 영이 풀려났다』-는 말을『하느님 대전으로부터의 사랑의 영』이라는 뜻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조물들의 생명 안에서 이 영이 어떤 이들에게는 따로 내리면서「하느님의 의향을 당신 뜻의 방향을」그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들(판관, 임금들)에게 있어서는 그 영이 특수한 힘을 발하게 하여 그들의 말이 예언적 말씀이 되게 하며, 그래서 예언자를 영의 사람(이슈하 루아흐)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호세아 9, 7). 그러나 특정한 상황에서는 영이 모든 이를 사로잡을 수 있으니, 요엘서 3장 1~2절이 이를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
에제키엘 역시 여기저기(특히 36, 24에서) 돌로 된 마음과 살로 된 마음을 이야기하면서 영적 혁신을 이루는 마당에서의 영의 개입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런 변신을 위한 회개(뉘우침과 돌아섬)를 원하는 마음에도 영이 작용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회개는 반드시「너와 같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이렇듯 영이 비록 물체성은 띠지 않아도 역시 모든 조물들 안에 현존하면서 이들을 가멸지게 함을 알 수 있다.
랍비 전통의 사상은 영의 역할을 예언의 역할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언의 영은 하깨와 자카리아와 말라키에 이르러 끝난 것으로(요마 9b) 여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은사적 감도로 인지되며 공부에 몸 바치는 이들에게 약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미슈나(유다교의 불성문율집(不成文律集))에 따르면 영이란 독실한 사람이 여러 단계의 영적 수행을 거쳐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랍비 문헌의 어디에서도 하느님과 떨어져 따로 있는 존재로서의 영에 관한 말은 없다. 때로는 영이라는 낱말이 하느님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셰키나(인간과 자연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영광(광운), 즉 내재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도 있으나 역시 별도의 존재로 이해도고 있지는 않다.
유다철학은 영을 셰이크(필로, (유다 사상가, 성서학자 전20~후50)의 설), 즉 하느님 영광, 또는 시현에 관한 랍비적 가르침에 접근시키고 있음을 본다. 마이모니데스(유다 철학가 1135~1204)는 영을 신적 지성의 감도(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에게 미치는 발로로 보고 있으며, 나흐마니데스같은 철학자는『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는 창세기(2, 7)의 말씀을 두고 그것은 『위대한 이름의 영, 그의 입으로부터 지식과 명오가 비롯되는 영』(페루셰하 토라I,33 )이라고 하고 있다.
라인강 유역의 하씨딤(독실) 신비주의(12~13 세기) 흐름 역시 내재하는 영광을 이야기한다. 「셰키나라고 부르는 것은 저 위대한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거룩함의 영과 동일한 것이다. 그로부터 하느님의 음성과 말씀은 비롯되는 것이다. 그 원천적 빛의 초점에서 발한 것으로서의 세상의 참조는 영에 힘입어 이루어진 일이며, 이런 가르침은 이미 9세기에서부터 전한다』고 하였다.
하씨딤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절대적 초연성을 받들면서도, 이 세상을 인간이 풀어주어야 거기 갇힌 하느님 빛이 그 근원과 도로 하나 될 수 있고, 또 이것이 따로 인간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과제라는 현재긍정의 길을 제시한다.
지난 한 세기 동안도 이상주의가 절대적 영을 절대 그 자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재발견하였다. 로즌쓰바이크가 창시하고 부버가 그 뒤를 이은 현대 시온사상에서는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창세기 서두의「어둠 위를 휘돌고 있는 영(1, 2)은 인격화로 이끄는 힘이며 더 높은 초월을 향한 힘」으로 보았다. 한편 네허르는 영을 계시의 절대적 원리라고 하였다. 끝으로 하씨딤계의 신비주의 사상은 신적인 영을 하느님과 인간을 불가분의 고리로 잇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