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올케와 함께 한강변으로 운동을 하러 가곤 한다. 노을 지는 강변을 달리는 사람, 열심히 걷는 사람, 애완동물을 데리고 나와 누가 누구를 끌고 가는지 모를 만큼 이리 저리 도로를 가로지르며 뛰고 있는 사람 등으로 때로는 붐비기까지 한다. 애완견들을 보다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곤 한다. 치와와가 자기 몸집의 몇 배나 커 보이는 피니시스피츠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따라간다거나, 푸들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벨기에 시프도그를 보고 서로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한 집에 살면서 같은 주인의 사랑을 받는 멍멍이와 야옹이가 서로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 가운데 하나로 유발 하라리 교수의 「사피엔스」(2015, 김영사)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책에 대한 비판 요소는 얼마든지 있지만, 책 앞부분에서 내가 그 동안 간과해 왔던 것 하나를 발견하고 그냥 그 책을 좋아하기로 했다. 알다시피 책은 인지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거치며 발전해온 사피엔스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수렵채집인이었던 최초의 인류에 비해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혹여 그 반대는 아닐까?’, ‘역사 이래 전쟁으로 사망한 사피엔스보다 자살로 죽어간 사피엔스가 더 많고, 수렵채집인들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사피엔스가 그들보다 노동시간이 더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오늘날 과학혁명에 직면하여 ‘유전공학과 사이보그 기술이 가져 올 혁명적 변화와 그로 인해 출현하게 될 새로운 인류가 과연 사피엔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 아니면 불행을 가져다줄까?’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하다. 한 마디로 우리를 심란하게 만드는 책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언급한 바, 내가 매력을 느낀 대목은 책의 앞부분에서 사피엔스들이 왜 세계를 점령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인지혁명이 있다고 해서 이전의 모든 호모들을 한꺼번에 물리치고 그들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하라리 교수는 교체이론과 교배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교체이론은 인지능력이 뛰어난 사피엔스들이 네안데르탈인이나 에렉투스와 같은 다른 호모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반감을 보이며, 심지어 인종학살이 일어나 그들의 개체수를 줄여 그들의 자리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교배이론은 신학적 관점에서, 진화론의 대척점에 설 수 있는 흥미로운 근거를 유추할 수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교배는 같은 종(種)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끌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동종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치와와와 피니시스피츠, 푸들과 벨기에 시프도그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피엔스가 원숭이나 유인원에서 진화했다면 지구촌의 수십 억 인류 중 적어도 어느 한 부족이나 종족, 최소한 어느 한 개체라도 유인원과 혼인을 했다는 보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피부색과 문화, 심지어 종교까지도 초월하여 사랑을 이루는 사피엔스들이 자신의 과거인 유인원에게 끌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神)을 보고 그에 끌려 일생을 헌신하며 그를 따르는 모양새가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현재의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모습대로’ 창조했다는, 그래서 그를 닮았다는 창조이론을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감각으로는 도달하지도 못하는 초월적인 세계까지 넘보며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그에게 달려가는 원초적인 고독이야말로 그에게서 느끼는 ‘동종의식’의 표현이 아닐까? 인류의 오래된 존재론적인 물음은 이렇듯 진부한 것 같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 있는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 같다.
김혜경(세레나·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강의전담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