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 후,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성’과 ‘종교적 전통’이 충돌하는 대립과 혼돈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인간의 모습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인류의 자연 상태는 각 개인이 다른 모든 사람과 충돌하게 되는, ‘만민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며, 계속되는 공포와 잔인한 죽음의 위험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홉스의 주장이 듣기 거북하고, 너무 지나치다고 느껴지시죠?
아픈 환우들과 아기들을 위한 가습기 세정제가 독극물로 제조되어도 오랜 시간 감출 수 있는 사회, 10년 남짓 판사와 검사로 재직했다는 이유만으로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미명 하에 상상할 수 없는 수임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 법 앞에 정의보다 재화가 더 힘을 발휘하는 사회, 단지 무시당한다는 느낌 때문에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 운전 중에 작은 실수와 욕심에 관용보다 보복으로 되갚는 사회, 주어진 자신의 몫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회, 학업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철저히 교육 시스템 안에서 배제된 가난한 학생을 누구 하나 안타깝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자신의 탓으로 돌려놓는 사회, 그렇게 길러내는 교육 시스템에서 포기와 좌절을 배우는 사회, 화합과 일치로 일구는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내 이득에 동조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패거리만 남은 사회, 모두가 자기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아무것에도 연민을 보낼 여유가 없는 각박한 사회를 지켜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홉스의 성찰은 정당하게 보일 것도 같습니다.
홉스에 의하면, 우리의 자연적 욕구는 그 자체로 선악(善惡)의 판단 대상이 아니며, 도덕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개인은 충돌하게 되어 있고, 각자가 안전을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회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홉스는 이러한 불안한 사회적 현상 안에 놓인 인간에 대하여, ‘인간 본성론’에서 “인생은 하나의 투쟁이며, 이 경쟁에서 오로지 최고가 되려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목적이나 목표를 갖지 않는다”라고까지 말합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오직 나의 욕망성취를 통한 ‘자기만족’만을 바라는 ‘인간’에 대한 홉스의 사회 반발적 통찰을 그저 웃고 지나치기엔, 우리나라의 현실이 너무도 닮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을 결핍된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채우고 살아가면서, 왜 우리가 욕망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성찰하지 못한다면, 홉스의 성찰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예언이 될지도 모릅니다. 일상을 의미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은 대단한 성공과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소박한 사랑과 거룩함입니다. 작지만 아름답고 거룩한 일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성찰을 통해 우리가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잊고 살아가는 우리의 귀한 운명을 되돌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속한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표상하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기에, 언론을 통한 단순한 심리적 조작이 아니라, 객관적 진리를 지향하고, 그 진리의 선상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일상을 통해 긍정되어야 축적할 수 있는 무엇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우리가 속한 사회에 던지는 신뢰감은 거저 생겨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상은 다양한 욕망이 부딪혀 우리네 경험을 이루지만, 경험들에 관한 성찰로 의미를 마련해야 하며, 그 의미는 선적인 목표를 지향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의 노력과 투지가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