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지하철 역사에는 요즘 난데없이 꽃이 피고 있다. 2호선 구의역과 강남역은 이제 시민들이 아무 생각 없이 다니던 그런 길이 아니다. 심한 상처로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마음들이 모이는 곳, 슬픈 눈길들이 ‘언젠가는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토로하는 장소가 되어 가고 있다.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거대한 물결처럼 형성되어 가고 있는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점차 그 영역을 지하철 역사에서 부산 등 지방은 물론 대학교 캠퍼스로 넓혀가고 있다. 또래 청년들과 여성들이 언제든지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내 아들 딸들의 문제다’라는 의식 속에 중장년층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가정의 달’, 5월에 우리는 잔인한 일련의 사건들을 접했다. 5월 17일, 강남역 20대 여성 살인사건이 있었고, 28일에는 구의역에서 19세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크린도어 사고’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29일에는 수락산 등산로에서 60대 여성이 살해되었고, 6월의 첫날에도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 14명이 희생되었다. 모두 언제든 ‘내 일’이 될 수 있는 사건, 사고들 앞에서 우리는 한 일간지의 표현대로 “‘추모’가 일상이 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사건, 사고들의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더 무섭고 슬프기까지 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그 이유가 여성을 ‘혐오’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왜 혐오하면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범인은 왜 여성을 혐오하게 되었는지, 그도 어느 여성의 아들이고, 조카이고, 손자였을 텐데, 누가 그로 하여금 여성을 혐오하게 만들었을까? 세상은 여성들이 있어서 핑크 빛으로 물이 드는데, 왜 그에게는 검은 빛이었을까? 하는 수많은 의문이 고개를 든다. 한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는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고된 노동을 버티던 어린 하청노동자의 꿈을 앗아간 어처구니없는 인재였다. 우리 사회의 ‘최고 갑(甲)’인 ‘돈’이 만든 시스템에 의해 청년이 희생된 것이다. 청년 노동자들의 저임금 비정규직의 악순환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말해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은 미비했으며, 인간은 여전히 실존의 주변으로 밀려나 타의건 자의건 존재감을 잃고 만다. 또 수락산 살인사건은 어떤가. ‘새벽에도 산에 사람이 다니나 궁금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는 범인의 진술이 마치 거짓말 같다.
보름 남짓 사이에 일어난 이런 사건, 사고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과연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성과 비정규직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서 약자를 상징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부분인 청년은 사회의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성과 청년이 죽어가는 사회는 미래가 죽어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본주의의 번지르르한 장막 뒤에서 신음하는 병든 영혼들이 때로는 지하철에서, 때로는 도로에서 소리를 지르며 탓 없는 행인들을 위협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그들에 대한 배려는 없고, 돈과 권력은 책상에 앉아서 인간을 잡아먹고 있다. 약자들은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아직도 여러 형태의 배제와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 헬조선 시대를 살아가는 흙수저 청년들에게 현실은 꿈꾸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외치는 시민들의 ‘공감’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는 가운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사람보다 우선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는 외침이 복음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