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에 올라온 어린 학생의 짧은 글이 마음을 크게 울렸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생각하는 과제’라는 제목 아래 ‘난 행복한 사람’이라는 주제를 달아 놓고,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 아이가 웅크린 채, 무엇인가를 길에서 주워 먹고 있는 사진’을 문제지에 제시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그림 속의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5분간 그림을 보며,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이죠. 선생님은 분명 학생들이 지금 처지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보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생님의 과제에 한 아이는 그 사진을 보며,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이 아픔을 해결해 주려하고,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될 것이다”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초등학생 글을 인용해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만, 일그러진 ‘우리 사회가 지닌 행복의 관념’에 대한 이 어린 아이의 일성(一聲)이 제게도 큰 울림이 되었기에 염치 불구하고 허락 없이 글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살아갑니까? 무엇을 행복이라고 믿습니까? 어린 학생이 제시한 ‘함께’가 빠진 나만을 위한 행복이 과연 가능할까요? 남과의 차별화를 통해 얻어 누릴 수 있는 그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많이 소유하고, 많이 누리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이 정말 행복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사유컨대,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수긍되지 않는 남들과의 차별화를 통한 행복에 대한 시선이, 왜 현실에서는 그렇게 간단히 용인되어 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지하철 공사장이나 지하철역마다 설치된 선로차단문(screen door)을 수리하는 사람들처럼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정당한 보수와 정당한 직책으로 채용하기 보다는 하청을 통해 어려움과 책임을 회피하고, 법이 이를 정당화해 줄 수밖에 없는 각박한 현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배움이 고작 그것이니 그렇게 사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내몰아 스스로의 품위조차 내동댕이치고라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인간에 대한 배움과 소유에서 오는 차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어찌 다 같을 수 있겠습니까만은 한 달에 130여 만 원을 벌어서 100만 원씩 꼬박꼬박 저축하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선로차단문 수리공의 뒷이야기는, 제 스스로 배움에 대한 미안함을 갖게 했습니다. 배우지 못했기에 서러웠고, 그래서 배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 걸어야 하는 사회 속에서 그들에게 배움을 강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었을 것이고, 저 또한 그 중에 하나였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우리 시대가 돈과 권력, 그리고 학벌에 갇혀서 인간 자체를 존엄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함’에 대한 가치가 아니라 ‘무엇임’만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와는 차별화된 남을 통해 반사적으로 누리는 저속한 기쁨이 행복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함께’가 아니면, 아픔이 있을 것이고, 그 아픔은 고스란히 우리 사회가 떠안아야만 하는 아픔일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며 평생 동안 진리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가 “자기 자신이 선하고 지혜로운지 살피기 전에 자기 소유물부터 살피지 말고, 도시 자체보다 도시의 소유물을 더 살피지 말며, 그 밖의 다른 일들도 이와 같이 살펴야 한다”고 가르치며, 폴리스에 남겼던 명언을 한 어린이의 글을 통해 다시금 마음에 담아 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